지금 떠올려보면 그다지 크진 않았을 테지만은, 어린 나에게는 참으로 커다랬던 향나무. 그 향나무들이 오른편으로 주욱 줄을 서있고, 왼쪽으로는 돌을 다루는 아저씨들이 사는 공장이 있는 짧은 오솔길을 지난다. 그러고 나면 기찻길이 보이고, 봄이면 노란 개나리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작은 공터가 있다.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참 많이 폈었지. 띵똥땡동 소리가 들리면 기차가 지나갔다. 역무원 아저씨가 나를 향해 흔들어주는 하얀 손이 너무 반가워, 하던 일을 팽개치고 늘 공터로 달려나가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왼편의 솜틀집 (목화 이불이 눅눅해지면 다시 틀어주는 곳)을 지나 우리 할머니가 정성스레 만들어놓은 장미꽃 넝쿨이 휘감아진 입구를 지나면 비로소 내가 살던 작은 동네가 나온다.
이곳을 마을이라고 불러도 될지. 외할아버지께서 50년전 서울에서 이사오며 땅을 조금 샀고, 그곳에 집을 짓고 셋방을 주어 한창때에도 10가구가 채 안되던 그런 곳을.
그로부터 2, 30년뒤, 개발 열풍에 힘입어 언덕 너머는 아파트 촌으로 변했고, 이 동에는 마치 슬럼처럼, 달동네처럼, 아파트도 빌라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화장실은 외부에 있는데다가, 그나마 있는 기름 보일러는 잘 안되기도 했다. 아마추어들이 손재주를 믿고 붉은 벽돌을 쌓고 스트로폼으로 단열을 했고, 바람이 줄줄 새는 창문에는 문풍지 덧대어야 했으니, 아파트와 빌라를 두고 누가 살고 싶어하겠나. (아마도 지었을 당시에는 나름 세련된 스타일이지 않았을까?)
내가 3살즈음 되던 때 나는 그곳에서 외할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아부지의 사업과 함께 살던 집이 날아갔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할머니는 나의 삶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고, 할머니를 이해하는 과정은 나를 이해하는 과정 중 중대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손주를 11명이나 본 우리 할머니는 안타깝게도 첫째, 둘째 사촌오빠를 빼고는 모두 손녀딸이었다. 할머니의 자식들 중 마지막으로 나오는 손주가 딸이었을 때, 할머니는 조금은 짜증이 나지 않았을까 싶다. (이것 어디까지나 할머니를 이해하기 위한 나의 추측) 그리고 정말 할머니를 골 때리게 했던 것은 그 남자도 아닌 막내 손주가, 아주, 미쳤다는 것이다. 산을 뛰어다니고, 지붕 위에 올라가 난리를 치며, 머리는 짧게 깎고, 밥은 아주 게걸스럽게 먹었다. 장독을 깨고 접시를 깨고 전혀 방정하지 않은 품행으로 나이 들어 피곤하기 그지 없는 할머니를 괴롭히는 것은, 참으로, 귀찮고 보기 싫었겠지. 손주도 아닌데 말이야.
할머니는 그런 나에게 여자다움을 늘 강조, 아니 강요했다. 내가 날라 다닐(?)때마다 할머니는 소리를 내질렀고, 접시를 깨먹을 때마다 엄청나게 꾸중을 받고 혼나야 했다. (맹세컨대 단 한번도 일부러 접시를 깬 적은 없다!) 나에 비하면 아주 차분하고 조용한 언니와 비교당하고, 언니의 잘못까지 내가 덮어쓰곤 했다. 어린 나는 자연스럽게 할머니가 날 미워한다 생각했고, 할머니에게 사랑 받을 수 없는 스스로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나를 미워했고, 내 몸을 미워했고, 세상을 미워했다.
머스마같기 그지없는, 제멋대로인 표정을 가진 얼굴은 점점 누군가에게 쉽게 사랑 받을 수 있는 어색한 웃음을 띈 얼굴로 변해갔다. 상처투성이인 몸은 감추고, 가렸다. 흙을 만지고 물을 만지고 하는 사이 악어가죽(!)처럼 변한 손을 늘 부끄러워야 했다. 단 하나, 내가 유일하게 지키는 것이 있었다면 긴 생머리. 나의 여성성을 간직하고 싶었던 마음에 아주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를 애지중지하며 보유하고 있었다.
사춘기로 넘어가니 몸에대한 콤플랙스는 더욱 심해졌다. (아마도) 평균에서 딱 그대로인 내 몸을 나는 뚱뚱하다 생각했다. 중학교시절 교복 외에는 단 한번도 치마를 입은 적이 없었다. 다리는 늘 널널한 바지로 감추고, 긴 팔에 긴 티셔츠를 입어 엉덩이와 팔을 감추었다. (패션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보다.) 고등학교 시절 조금씩 조금씩 나아졌지만, 조금 더 어울리는 방식으로 감추는 것을 알았을 뿐, 절대 드러낼 용기가 생긴 것은 아니었다.
내 몸을 사랑하지 않고는 절대로, 절대로 나를 사랑할 수 없다. 연애도 하지 않았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부담, 두려움으로, 도망쳤다. 좀처럼 사랑받을 수 없는 인간이었다.
그러다 20대 초반 무렵, 잠깐 만난 것뿐이었지만, 이런 나를 변화시킨 이가 있다. 인도여행 중에 마사지 워크샵에서. 마지에 큰 뜻이 있었던건 아니었다. 그저 호기심으로 찾아간 그곳에는 한국 여성 한명을 만나게 된다. 서양인들 아니면 인도인들로 가득찼던 그 곳에서 한국인이라니!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그분은 자신을 미워하는데 익숙한 토종 한국 여성인 나와는 달랐다.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핀란드로 입양었고, 호주에서 하와이안 마사지를 배웠고, 지금 인도에서 수업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나라로 넘어갈 예정이라고 했다.) 이렇게나 여러 국가의 아이덴티티가 짬뽕되어있는 그녀는 나이가 꽤나 있는 동양인 여자였지만, 자신감이 넘쳤고, 아름다웠다. 긍정적인 에너지가 흘러나오는 그녀는, 나를 몸의 세계로 인도했다.
첫날, 두근 설레는 마음으로 갔다. 천 한 장만 걸치고 있는 여자 한 명이 있었다. 설마, 하는 생각했는데 역시나... 전라(?)로 하는 마사지였다. 우리는 시간마다 옷을 전부 벗어야 했다. 물론 속옷까지. 며칠 동안 더운 가을의 인도에서, 햇볕이 드는 바닷가 앞 센터에서 벗기 쉬운 티셔츠 한 장 그리고 룽기 (긴천 한 장으로 입는 치마)하나만 걸친 채 처음 보는 남정네와 여인네들의 몸을 만졌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부끄러웠다. 그녀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당신의 몸은 아름답다. 라는 말을 해주었다. 그리고 우리가 몸에 대해 불안해하는 것을 배려하는 방식으로 아주 부드럽게 서로의 몸에 접근하는 방식을 가르쳐주었다. 어색한 터치는 점점 편해지고 익숙해졌다. 그 과정이 끝날 무렵 나는 못생긴 나의 몸은 물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몸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몸들은 만나고, 탐험하고, 관찰하고, 만지는 것이 나에게 참으로 기쁨을 주는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내 몸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사랑받을만 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습게도 내가 내 몸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옷을 벗고 거울 앞에 서보았다. 여기저기를 살펴보기도 하고, 사진을 찍어보기도 한다. 여전히, 단점들도 보이지만 끔찍하게 보기 싫던 전과 달랐다. 긴 바지와 긴치마로 가려왔던, 그토록 못생겨 보였던 울퉁불퉁한 나의 다리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내 다리와 잘 어울리는 짧은 치마와 바지를 입기 시작했다. 두껍고 피부가 닭살이라 내보이기 싫었던 팔뚝 살을 성큼 드러낸 슬리브리스 티는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나와 잘 어울렸고, 겨드랑이 사이로 제멋대로 자란 겨드랑이 털은 나름 귀여워 보였다. (하하....)
다른 사람들은 생각보다 나를 신경 쓰지 않았고, 혹 신경 쓰는 사람이 있다 한들 그 사람들을 내가 신경 쓰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래, 나는 과거로부터의 내가 가지고 있던 한 꺼풀을 벗고 있고, 계속해서 벗어나가는 탐험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탐험은 나의 몸을 사랑하는 과정과도 닿아있다. 인도에서의 경험은 첫 시작이었고, 그 뒤로 난 떠돌고, 만나며 내가 몸이 가지고 있던 단단한 갑옷에 균열을 내고 무너트리고 무너트리는 중이다. 하나 둘씩 벗고 나면 나라는 사람이, 나라는 여자가 가지고 있는 순수한 에너지까지 도달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오늘밤, 혼자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조용한 공간에서, 충분히 시간을 들여 내 몸을 바라보고 찍어보고 그려보고 만져보자. 그리고 예쁘다고 사랑스럽다고 얘기해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