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그러니까 여행을 시작하는 날 아침에 이곳에서 7년간 활동한 미국인 활동가 캐런을 만났다. 북쪽으로 간다는 우리에게 캐런은 이크리트(Iqrit)에 가라며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었다. 아랍 기독교인들이 사는 마을이었는데, 전쟁 이후로 마을을 떠나야 했고 아직까지 싸우는 중이라고 했다. 전화를 해보니 내일 전 세계에서 모인 40명의 주교들이 방문할 예정이라, 시간 맞춰서 오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게다가 이미 팔레스타인 한국연대 활동가 새라씨에게 가보면 좋겠다며 전해 들은 적 있는 곳이라 이 정도면 '꼭 가야 해!'라는 마음으로 즉흥적이지만 일정을 바꾸게 되었다. 어제 하루 묵은 나리야에서 걸어가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는 거리라 일단 레바논과의 국경지대인 슈툴라(Shtula)로 차를 얻어 타고 가고 거기서부터 이크리트까지 7킬로미터 정도를 걷기로 했다.
레바논 국경지대의 총격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서 세워진 두터운 콘크리트 벽은, 평화를 기원하는 전 세계의 아티스트들의 그림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곳에는 두 명의 이스라엘인 군인이 지키고 있었다. 앳되어 보이는 얼굴의 두 사람은, 아마도 19살이나 20살 정도이겠지. 그들은 우리가 어디서 와서 왜 왔는지 물었다. 다른 곳으로 가려는 우리를 막아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벽화를 보는 우리를 계속 지켜보았다. 이제야 이 벽화들이 눈에 들어왔는지 온갖 포즈를 취하며 서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어깨에 총을 메는 것은 절대 잊지 않은 채 말이다. 제복과 총을 패션으로 생각하는 그들은 이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며 자랑스러워하려나.
우리는 벽화 밖으로 나와 걷기 시작했다. 차도를 따라 걸었지만 차가 많지 않아서 힘들지 않았다. 지나는 길 나오는 마을 쇼메라(Shomera)는 이크리트 마을 주민에게는 유대인 극우파, 어떤 유대인들에게 듣기로는 평범한 시민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스치듯 쇼메라를 지나 이크리트 인근에 도착했다. 깜빡하면 지나쳐 버릴지도 모르는, 수풀에 가려있는 작은 오르막 길이 이크리트가 있는 곳이다. 가파른 언덕을 15킬로 배낭을 짊어지고 오르막을 오른다. 이건 다 건강해지는 과정이야! 나를 달래며.
꼭대기까지 오르니 몰아치는 바람 뒤에 교회가 우뚝 서있다. 그리고 귀여운 인상을 한 체크 머플러 할아버지가 우리를 반긴다. 살라말라이쿰, 말라이쿰살람. 평화가 당신에게 함께 하길(Peace be upon you)이라는 뜻을 가진 아랍 인사말은 늘 가슴 한편을 따듯하게 덥힌다. 아직 사람들이 다 도착하지 않은 이크리트에는 바람만 세차게 불었다. 이렇게 바람이 많은 곳에 사는 사람들은 필시 강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아까 그 할아버지의 이름은 한나, 아부나셀(나셀 아빠)이라고도 불린다. 그는 저기 언덕 머너가 레바논이라며 내게 가르쳐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두명의 할아버지들, 그리고 몇 명의 젊은이들이 도착하더니, 큰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도착했고, 곧 양복을 차려입고 목에는 십자가 목걸이를 맨 수십여 명의 주교 무리와 이크리트 마을을 소개하는 나미라는 분이 도착했다. 마을공간과의 짧은 인사 시간을 가지고, 나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 이크리트는 기독교 아랍인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었습니다. 50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죠. 당시 팔레스타인 영토에는 3개의 기독교마을이 있었는데, 그때 마을을 떠나야 했던 것은 이크리트가 유일합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영토로 들어와 전쟁을 일으키고 정부를 수립한 지 6개월 정도가 지났을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정부는 국경지대를 정리하던 중이었습니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마을을 찾아왔지요. 마을 사람들은 저항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그들을 반기었지요.
그리고 며칠 뒤, 1948년 10월경 그들은 다시 마을에 찾아와 교회 목사와 마을 대표에게 마을을 떠날 것을 요청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당연히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1주일 뒤에 사령관에게 편지가 왔습니다. 마을을 떠나고 나면 2주일 뒤에 다시 돌아올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높으신 분의 이야기를 믿고 살림살이도 다 두고 떠났습니다. 빈 집과 짐을 지킬 수 있도록 60여 명의 주민들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동쪽의 라미마을로 갔지요. 당시에 우리를 받아주던 것은 라미마을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2주가 지나 마을 사람들은 돌아오려 했습니다. 이 시대는 전쟁 시대라 이동하려면 허가증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요청한 허가증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대법원에 항소하였고, 1951년 7월 대법원은 이크리트 마을 사람들을 돌려보내야 한다고 판결했어요. 그러나 여전히 허가증은 나오지 않았고, 참 상징적 이게도 1951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날 저녁에 군인들이 이크리트 마을로 들이닥쳐 마을에 남아있던 사람들을 쫓아내고 집들을 모두 부수어버렸습니다. 그때 교회와 공동묘지만 빼고 마을의 모든 집들이 부서진 거예요.
- 우리는 계속 싸움을 이어가고 있어요. 군인들의 철거 작업은 계속됩니다. 언젠가는 새벽에 찾아와서 교회로 오는 길들을 모두 부쉈어요. 새벽 1시에. 그리고 우리는 그날 바로 다시 모여서 길을 포장했습니다.
교회 옆에 붙어있는 가건물도 몇 번이나 철거당했어요. 마을 주민들 중 한 명이 매일 지키고 있습니다. 여름에는 매해 캠프를 열어요. 이스라엘 곳곳으로 흩어진 이크리트 마을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살기도 하고, 하이파에 살기도 해요. 하지만 여름이 되면 이크리트 마을에 모두 모이지요.
나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교들은 다음 일정을 맞추기 위해서 서두르기 시작했다. 교회에서 짧은 기도를 마치고 주교 무리도, 언론사에서 왔는지 인터뷰를 진행하던 사람들도 떠나고 나니 마을 사람들과 우리만 남았다. 우리는 마을의 이야기를 더 들을 수 있었다. 교회 안에 걸려있는 1945년도의 마을 사진을 찍으려는 나에게 조지는 말했다.
- 철거되기 전에 마을 사진은 이거 딱 한 장밖에 없어요. 이 사진을 가지게 된 대도 이야기가 있어요. 아부나셀은 병원에서 일하고 있어요. 그가 병원에서 우연히 만난 유대인이 마을 사진이 있다며 건네주어 받게 되었어요. 참 우연이지요. 사진 속 마을이 어때 보이나요? 정말 아름다운 마을이죠?
언덕배기에 아기자기하게 모여 있는 마을의 모습은, 분명 내가 방금 걸어 올라왔던 언덕의 모습이었지만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 나는 라미마을에서 태어나서 지금은 코프리아시브에 살고 있어요. 그래도 여기에 일주일에 한두 번 와요. 나고 자란 곳은 라미이고, 코프리아시브에 살고 있지만 여기가 더 내 집 같아요. 한 번도 살아본 적 없지만요. 그럴 수만 있다면 여기서 살고 싶어요. 그러나 그 꿈은 죽어야만 이룰 수 있죠.
이스라엘 정부는 교회와 함께 아래쪽 공동묘지는 무수지 않고 남겨놓았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장례를 치르는 것만은 허락했다. 이크리트 마을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곳에 묻혔다. 그렇기 때문에 라미마을 사람들은 죽어야만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죽어야만 허락되는 귀향. 그것은 이크리트 마을이 가진 비극이자 슬픔이고, 아이러니였다. 그것을 감히 잊지 않기 위해서인 듯 마을 사람들은 마을에 돌아올 때마다 항상 부서진 집터와 함께 공동묘지에 다녀갔다.
조지는 우리를 사람들에게 이끌었고, 쉬고 있는 아저씨 무리(?)들 중에 제일 먼저 와서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고, 여기저기 사람들을 만나며 돕고 있는 아부나셀이 궁금해졌다. 아부나셀에게 다가가 이것저것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 여기에 얼마나 자주 오시나요? 와서는 무얼 주로 하세요?
- 일주일에 두 번씩 꼭 와요. 오면 주로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지요.
- 당신의 집터는 어디였나요?
그는 조용히 손짓을 하며 따라오라고 했다. 우리는 부서진 집터 앞에 섰다. 아래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배기에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이제는 집 대신에 꽃과 풀로 가득 채워져있었고,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 만약에 집터에 들리지 않는다면 내가 왔다가지 않았다는 거예요. 얼마 전에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어요. 그때 나는 말했어요. 이크리트는 나를 나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곳이라고. 참 아름다운 풍경이지요? 나는 아쉽게도 자식을 2명밖에 낳지 못했어요. 아내는 그리고 저기 공동묘지에 묻혀 있지요.
그리고서는 그는 성큼성큼 교회로 돌아갔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를 따라 교회로 들어가기 보다 그곳에 서 있기를 선택했다. 먹먹한 감정이 몰려왔다. 70년 전 부서져 아직도 집터에 그대로 나뒹굴고 있는 벽돌들, 불어오는 바람, 아부나셀의 발걸음으로 만든 풀 숲 속의 작은 길. 저 멀리 보이는, 아부나셀의 부인이 잠들어 있는 공동묘지. 그리고 그곳을 다녀가는 사람들. 한 때는 이크리트 마을 사람들이 농사를 지었던, 그러나 지금은 비어져 있거나 유대정착민들이 들어와 있는 주변 땅들.....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슬퍼할 수밖에 없었다. 주변을 돌아다녀봐도 언덕배기 곳곳에는 부서진 집의 벽돌만 있었고, 그 사이사이는 겨울의 초록과 꽃들이 메워주었다. 팔레스타인은 건조한 여름과 달리 비가 많이 내리는 겨울이 풀과 꽃이 자라는 시기이다. 꽃으로 채워진 이크리트의 언덕은 오랜 시간 기독교 아랍인들이 살아왔다. 잠시 그들은 그곳을 떠나야 했지만 여전히 이크리트는 그들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감정이 정리되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다시 교회와 캠프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어서 이리로 오라며 손짓한다. 그리고 따듯한 차와 빵을 건넨다. 손자뻘로 보이는 젊은이들과 파파 할아버지들은 서로 농담 따먹기를 하며 깔깔깔 웃으며 시간을 보냈다. 셀카를 찍기도 하고 락앤롤 핸드사인을 배우기도 했다. 앉아서 그들을 지켜보는 나에게 아부나셀은 내게 물었다.
- 당신을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요? 저널리스트(기자)인가요?
- 아니에요. 저널(일기)을 쓰고 있긴 하지만 저널리스트(기자)는 아니에요. 하지만 이 마을의 이야기를 알리고 싶어요. 제가 사진을 찍고 당신의 이야기를 한국 사람들에게 알려도 될까요?
그는 오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말했다.
- 네 그러세요…
우리는 이제 이크리트를 떠나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려 했다. 우리에게 설명을 해준 나미의 아버지 아부나미는 가려고 인사를 하니 갑자기 이런저런 이야기를 묻기 시작하셨다. 어디서 왔냐는 물음에, 한국에서 왔다는 나의 이야기를 듣고, 무언가 기억하려 하신다. 아! 내 손주가 말이지…. 그, 그, 갑자기 말을 멈추는 아부나미. 한 단어가 영어로 생각나지 않는다며 심각해졌다. 심각하게 고민하는 아부나미를 보고 나는 조지와 아부나셀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들은 아랍말로 이야기를 나눴다. 조지는 모르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아부나셀은 가라테가 아니냐며 물었다. 아니란다. 나는 혹시 태권도를 말하고 싶었던 건가? 아니면 유도와 헷갈린 건가? 가라테와 헷갈릴 만한 동양의 몇 가지 수련들을 이야기했지만 아부나미가 말하려 했던 것은 다 아니었다. 모두 다 가티 5분 정도 심각한 아부나미를 눈앞에 두고 쩔쩔 메다가, 포기하고 돌아서 걸음을 뗐다. 세 걸음쯤 걸었을까? 갑자기 아부나미가 시원하고 놀란 표정과 함께 생각났다며 외친다…….
- 요가!!!
나는 깔깔깔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이란 말을 듣고 떠올라 내게 해주고 싶은 말은 손주가 요가를 배우고 있다는 말이었던 것이다. 하하 요가라니. 맞출 수 있을 리가 없지. 이렇게 아부나미의 수수께끼는 풀렸다. 이크리트는 아프고 슬픈 오랜 기억과 웃음이 가득한 밝은 오늘의 기운이 함께 반짝거리는 곳이었다.
파란색 양복을 차려입은 일리야스 할아버지는 너희가 가는 곳, 아크레(Acre)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하셨다. 일리야스는 이크리트에만 있으면 다른 곳에 있을 때보다 기운이 난다고 했다. 일흔네 살의 일리야스는 아주 정정했고, 젠틀한 운전으로 우리를 아크레로 데리고 갔다. 조지는 우리가 탄 차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코에 도착해 일리야스는 작은 선물이라도 건네고 싶다며 나에게는 펜과 사탕을, 로비에게는 휴대용 전등을 선물로 주었다. 우리는 괜찮다 했지만 그는 꼭 가져가야 한다며 우리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뭐라도 주고 싶은 따듯한 마음을 거절하지 못하고 받았다. 일리야스는 집으로 돌아가고, 우리도 발걸음을 옮긴다. 자꾸만 요가! 를 외치는 아부나미의 얼굴이 떠올라 혼자 낄낄거리며 아크레의 거리를 걷는다.
이크리트는 70년간 싸워왔고, 앞으로도 싸울 것입니다.
그들을 자기 자신으로 만들어주는 고향땅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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