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래 날래~ 오라우
늘 그렇듯, 옛 지도를 살펴보다가 알게 된 이름 있는 고개가 있었습니다. 문제는 산의 낮은 곳인 안부를 넘어가는 단순한 고개가 아니고 복잡하게 산을 돌아가는 형태를 하고 있어서 정확한 고갯길 포인트를 가늠하기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집에서 가까우면 부담 없이 금세 달려가 확인을 했을 텐데, 꽤 먼 곳인 데다 이곳과 관련한 블로그 등산 산행기를 봐도 특별한 내용이 없어 탐사목록에서 일단 후순위로 보류해 두었죠.
그러다가 산행기가 하나 올라왔는데 거기서 베일에 가려져 있던 옛길과 고개, 서낭당 흔적이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렇다면 당장 달려야죠.
그곳은 꽤 멉니다. 무려 38선을 넘어야 하죠. 38선은 한국전쟁 이전에 남한과 북한을 위도 38도선을 기준으로 그은 직선의 경계였으나, 전쟁 발발 이후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오늘날의 휴전선으로 경계가 재편성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는 상식이지만 간혹 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더러 보았습니다. 만약 지금도 38선이 남북의 경계라고 한다면, 저는 브런치 최초로 월북 금속탐지 작가가 되는 셈이죠. 아마도?
그래서일까요? 뭔가 긴장감이 감돌기도 하고, 지상낙원 수령님 품으로 가는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38선 표지석 옆에 휴게소가 보입니다. 38선 휴게소라니 왠지 북한 국영 상점에서 팔 것 같은 물건이라도 있는거 아닐까해서 들어가 보았으나 특별한 것은 없었네요. 차라리 38선을 테마로 한 기념품이라도 만들어 팔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적지로 가기 위해서는 좁은 임도로 꽤 진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중간중간 임도가 여러 갈래로 갈라집니다. 여기서 문제가 하나 있네요. 산이 험하다 보니 휴대전화 전파가 잡히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길이 매우 꼬불꼬불하기 때문에 위성지도가 먹통이 된 상태에서 생각 없이 가다가는 엉뚱한 곳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만만하게 생각했다간 정말 큰 코 다치죠. 그래서 이럴 땐 정신 바짝 차리고 머릿속에 들어있는 뇌이버 지도를 써야 합니다. 예민한 거리감각과, 방향감각까지 총동원해야합니다. 음악이 나오지 않을 때가 거의 없는 마이카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절대로 긴장의 고삐를 늦춰서는 안 되기에 음악을 끕니다. 이렇게 목적지 부근에 무사히 안착했네요.
그런데 뭔가 시작부터 예감이 좋지 않습니다. 산이 온통 깎인 채 공사가 벌어졌네요.
산행기에 등장했던 풍경과는 달리 나무도 많이 베어져 있고, 안개 너머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여러 대의 중장비 소리가 온 산에 가득합니다.
이럴 때는 예감이 좀 빗나가도 좋으련만, 불길했던 예감은 어김없이 적중하고 맙니다. 형편없이 무너져 내린 돌무더기를 보니 그만 맥이 탁 풀리고 마음도 함께 무너져 내립니다. 저보다 먼저 온 금속탐지인이 있었네요. 대체 누구니 응? 그런데 정리라도 좀 잘 하고 가지.
이런 경우 전문 용어로 '설거지'라고 하죠. 남이 먹고 남긴 찌꺼기나 겨우 얻어 먹으면 다행인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긴 저도 다른 사람들 설거지 무지하게 많이 시키긴 했겠네요.
38선까지 넘어 어렵게 왔는데 탄식이나 하고 좌절하면 뭐 하겠습니까? 그래도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야죠. 장비를 풀고 시작해 봅니다.
응? 그런데 의외로 쉽게 엽전이 탐지됩니다. 푸르뎅뎅한 상평통보 하나가 톡 튀어나오네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상평이는 "얼마 전에 어떤 무섭게 생긴 아저씨가 와서요, 내 친구들 막 잡아가고 그랬어요." 라고 그간 있었던 일을 마치 고자질이라도 하는 듯합니다.
"저런... 그랬구나, 안심하렴~ 난 모시러 온 거지 잡으러 온 게 아니란다."
그 무서운 아저씨와 내가 뭐가 다른지는 잘 모르지만, 일단 그렇게 안심시키고는 다음 엽전을 잡으러... 아니 모시러 본격적으로 탐지기를 돌려봅니다.
금세 가까운 곳에서 또 엽전을 잡아... 아니 모십니다.
금세 또 나오네요. 먼저 왔던 사람이 아마 고수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만약 저 같았다면 절대로 이럴 일이 없죠. 지나간 자리에 엽전은 물론 앉은 자리에 풀 한 포기조차 나지 않는다는 독한 금속탐지인이 바로 접니다.
일본 메이지 7년(1874년)에 발행한 대형 1전 청동화입니다. 일본 내에 잔존수량이 많아 가치가 떨어져 그렇지 이무기가 도안된 디자인 자체는 매우 훌륭합니다.
대한제국 반전도 나옵니다. 대한제국 것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이 동전도 바로 위에 나온 메이지 1전 청동화와 마찬가지로 일본 오사카 조폐국에서 만든 것입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근대적 화폐제조 기술이 없어 일본에서 수입해 화폐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한글이 쓰여있는 대한제국 동전이라 인기가 있고, 희소성도 높아 가격이 제법 비쌉니다.
하단에 '화수목금토' 오행(五行)의 글자가 새겨진 중형전이 2개나 나옵니다. 오행 중형전은 동양철학과 한의학에서 빠질 수 없는 음양오행설이 상평통보에도 잘 적용된 사례입니다.
20kg은 족히 넘을 큰 돌 아래 신호가 잡혀 힘겹게 들어내자 그 아래에서 철마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상태가 매우 안 좋네요. 쓰레기 같아 보이는 쇳조각이지만, 그래도 백 년은 훨씬 넘은 유물이라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기엔 왠지 미안해 일단 챙겨봅니다.
이번엔 철마와 비슷한 '마형 토우(馬形 土偶)'가 나왔습니다. 작은 말을 흙으로 빚은 다음 구워 만든 것으로, 금속탐지기엔 걸리지 않으나 곡괭이로 땅을 파다 보면 간혹 생체 레이더에 잡히곤 합니다. 그런데 몸이 아주 조각조각 났네요. 마치 토막살마의 현장을 보는 듯합니다.
개인적으로 엽전도 좋지만, 예상치 못한 이런 게 너무 좋습니다. 뻔한 것보다는 전혀 예상 못했던 것에 더 흥미를 느끼고 빠져들기 마련이니까요.
조각난 토우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래서, 이번에도 잠시 타임슬립을 했습니다. 토우가 조각난 원인은 세월에 따른 자연적인 균열과 그 사이를 파고든 풀뿌리 때문입니다. 깨끗하게 세척을 한 후 틈새에 남아있는 풀뿌리를 깔끔하게 제거합니다.
이제 준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얼핏 보아도 완전체가 되기엔 다리도 2짝에 불과하고 조각수가 조금 부족해 보입니다. 흙과 돌이 뒤섞인 곳에서 파편들을 어렵사리 찾아내긴 했는데, 이럴 줄 미리 알았다면 끝까지 최선을 다해 열심히 찾아볼걸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완전히 건조한 후 접착제를 조금 바릅니다. 만약 돌이키고 싶을 때를 대비해 강력한 접착제보다는 목공용 풀을 사용합니다. 물에 적시기만 하면 서서히 접착력이 약해져 다시 떼어낼 수 있죠. 이전에 깨진 화석을 붙일 때도 같은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뭔가 절대로 돌이킬 수 없는 것보다는, 마음먹으면 그래도 돌이킬 수 있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하나씩 붙여나갑니다. 마치 3D 블록 퍼즐을 맞추는 듯한 기분이네요.
반대쪽도 조립을 시작합니다.
드디어 몸통 부분이 완성되었습니다. 하지만 조립하고 보니 딱 3조각이 부족하네요. 분명 그곳 가까이 있었을 텐데 함께 데려오지 못해 너무 안타깝습니다. 특히 다리 2개가 없는 게 참 아쉽습니다. '내 몸통 내놔' 하면서 다리가 예까지 따라와 주면 오죽 좋으련만.
이번엔 다리를 붙여주었습니다. 2개밖에 없는 까닭에 무게중심을 맞추지 못해 가엽게도 제 스스로 서지를 못하네요. 근처에 있던 조개화석에 몸을 의지해 겨우 일어섰습니다. 나중에 부족한 부분을 찰흙으로 메꾸고 다리도 복원해 붙여주면 어떨지 한 번 고려해 봐야겠네요.
끝으로 말안장을 얹어줍니다. 모양은 투박스러워도 100년은 훨씬 넘은 골동품이자 보면 볼수록 매력 있고 정감이 넘치는 모습입니다.
원래 모습을 찾게 되어 기분이 무척 좋은가 봅니다. 활짝 웃고 있네요. 저도 덩달아 기분이 좋습니다.~
다시 산으로 왔습니다. 오늘의 최종 결과물입니다. 초반에는 쪽박을 우려했지만, 설거지한 것 치고는 결과가 매우 좋습니다. 만약 6.25 전쟁이 나지 않았다면 지금도 북한에 있었을 친구들이네요. 뚱땡이 김정은 꺼 뺏어온 거 같아 왠지 평소보다 두 배로 뿌듯합니다.
'내가 너희들을 지옥에서 구했구나!'
"수고했어, 오늘도!"
아, 그러고 보니 몸체를 싸고 있는 은색의 고오급 수도관 커버가 사라졌네요. 지금까지 이걸 몰랐다니... 운 좋게 하산하는 길에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해 다시 씌웠습니다.
앞서 본 풍경처럼 이 깊은 산속에 난데 없이 공사가 벌어진 것은 풍력발전소 건설 때문이었습니다. 아마도 지금쯤은 고갯길 흔적 하나 남기지 못하고 모조리 사라졌을 것입니다. 오늘 잡아온 동전들과 토우는 어쩌면 영원히 빛을 못 볼 뻔했네요. 운명론적 세계관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이 또한 몇백 년 전부터 만나기로 예정되어 있던 기막힌 인연이라고 생각합니다.
금속탐지 포인트를 찾다 보면, 이름 있는 고개들이 콘크리트 또는 아스팔트 길이 나거나 건물이 들어서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찾은 포인트도 그러한 곳 중 하나입니다. 설거지를 백번 한들 고갯길 돌무더기 흔적 정도는 남기 마련이지만 중장비를 이용한 개발과 정비는 그러한 흔적마저도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기 때문에 씁쓸함이 큽니다.
비록 역사 속에서 지워졌겠지만, 이 고개에 돌무더기 서낭당이 있었다는 것을 직접 본 증인이자, 그 속에 들어있는 조상들의 염원이 담긴 엽전도 만날 수 있는 행운아가 되었습니다. 이는 모두 금속탐지라는 취미를 알게 된 덕분이라 할 수 있겠네요.
'잊지 않을게. ㅇㅇ고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