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대 오르도비스기
태백시는 고원도시입니다. 따라서 겨울이 매우 길고 추우며 나머지 계절도 서늘하죠. 그래서 모기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태백 하면 석탄이 유명하죠. 전성기엔 10만 명이 훨씬 넘게 살았던 곳이지만 석탄 산업이 쇠퇴하며 이제는 군 단위 수준으로 인구가 줄었습니다.
화석을 만나러 수십 번은 갔던 태백이지만, 이번엔 화석보다는 태백의 여러 모습들을 천천히 감상하기로 마음을 먹고 여행을 떠나보았습니다.
먼저 통리역에 왔습니다. 예전엔 통리에 장이 서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의 주민들이 빠져나가 매우 고즈넉한 곳이 되었습니다. 통리역도 결국 폐역이 되는 운명을 맞이했죠.
수많은 사람들을 태우고, 또 석탄을 실어 날랐던 기차는 사라지고 철로엔 빨갛게 녹이 내려앉았습니다.
따뜻한 봄,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철로를 혼자서 천천히 걸어봅니다. 사방은 적막, 시간조차 천천히 흐르는 것 같습니다. 이 느낌, 정말 좋네요.
제가 좋아하는 터널이 나왔습니다. 터널에서 기차를 마주치면 위험천만한 일이 되겠지만, 이제 떠나버린 기차는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도 터널이 나오죠. 마치 저 또한 이 터널을 통해 다른 세상으로 갈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어두운 삶의 긴 터널 끝에 어렴풋이 빛이 보이면 희망이자 구원으로 느껴질 듯도 합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에서와 같이 터널을 빠져나오자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면 더 좋겠지요.
터널을 빠져나오자 탁 트인 전망이 나타났습니다. 저 멀리 삼척시 도계읍이 한눈에 들어오네요.
철길은 인생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삶의 다양한 모습을 담은 은하철도 999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끔 인생에서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나기도 하죠. 지금이 그렇습니다. 인생을 닮은 철길에서 달갑지 않은 복병을 만났네요. 사진을 잘 보면~ 보입니다.
다른 방향에서 내려오는 철길과 합류한 지점을 지나니 뒤에서 소리가 들려 돌아보았습니다. 도계 쪽에 철도 관련 테마파크에서 운영하는 레일바이크인 듯합니다. 지나면서 반갑다고 손까지 흔들어 주니 사교성 제로인 저로서도 웃으며 인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꽃 피는 봄에 레일바이크를 타고 한적한 철길을 내려가는 것도 참 낭만이 있어 보입니다.
통리 다음 역인 동백산 역입니다. 여기는 현대식으로 깔끔하게 역사를 만들어 놓았네요. 그래봐야 하루에 화물 열차만 겨우 몇 대 다닐 테니 예산 낭비가 과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차를 조금 더 몰아 철암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때마침 석탄을 싣는 화물 열차가 지나갑니다.
철암에는 석탄을 열차에 싣는 대규모의 선탄장이 있습니다. 뒤로는 석탄이 산처럼 쌓여있죠. 때문에 탄가루가 바람에 날려 근방 주민들은 늘 피해를 호소합니다. 폐질환은 물론 빨래조차도 널지 못한다고 할 정도죠.
이 건물들은 일제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국가 등록 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석탄을 싣기 위해 대기 중인 화물 열차. 조금 전 건널목 철길을 통과했던 그 열차인 듯합니다.
산처럼 쌓인 석탄이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아래로 이동합니다.
이렇게 운반된 석탄은 기차에 실려 연탄 공장이나 화력발전소 등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관광열차를 비롯해 디젤기관차, 화물 열차가 한데 모여있네요. 또한 철로가 많은 것을 보니, 역시 한때는 이곳이 매우 핫한 기차역이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봄 햇살을 받아 뜨거워진 지열을 타고 어른어른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습니다. 상이 구불구불한 광경은 마치 몽환적인 인상파 화가의 그림을 연상케 합니다.
철암마을의 풍경은 1970~80년대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곳에 있으면 그때로 시간 여행이라도 하는 듯한 기분입니다.
폐건물 옥상엔 탄가루를 뒤집어쓴 맥콜병과 써니텐병이 있습니다. 빈병 줍는 재미를 좋아하지만, 미개봉 상태라 내용물도 있어 꽤 무겁습니다. 저는 '빈'병을 줍습니다. 따라서 못 본 걸로~
철암천을 건너 산책로를 따라 산으로 올라가면 삼방산 마을이라는 작은 동네가 나옵니다. 산책로엔 신발속 탄가루를 쏟아내는 광부의 동상이 놓여있습니다.
높은 곳으로 올라오니 철암이 잘 내려다보이네요. 다만 멀리 깎여있는 산의 모습이 흉물스럽습니다. 맑은 날씨였지만 석탄 분진이 많은지 산 쪽엔 스모그가 낀 것처럼 뿌옇습니다.
다시 평지로 내려왔습니다. 이것은 건물 뒤편 하천에 기둥을 내려 지은 이른바 '까치발'건물입니다. 평지가 부족해 조금이라도 더 건물 평수를 늘리기 위함이었죠.
건물 뒤쪽을 보면 왜 까치발 건물이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특이한 건물이라 철거하지 않고 보존해 전시관으로 탈바꿈했습니다.
그 중 한 곳을 골라 입구로 들어왔습니다. 겉은 비록 허름해도 내부는 매우 깔끔합니다.
추억 돋는 동네 개구쟁이~
지하실 계단 쥐도 재현~
당시 생활용품~
옛날 호황기엔 돈이 넘쳐났다죠. 서울에서도 보기 힘들었던 sony 카세트를 1970년대 강원도 산골에서 쓰고 있었다는 사실~
다른 건물에 왔습니다. 여기는 예술 공간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와우~ 예술입니다. 아무튼 예술~
또 다른 전시관. 예술이긴 한데 개인적으로 뭔가 좀 심심한 느낌입니다. 좀 전은 정말 예술이었는데...
또 다른 전시관, 은근 기대하고 들어왔는데 역시 심심합니다.
철암역입니다. 오래전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곳이어서 다층으로 크게 지었다고 하죠. 역사 건물치고는 평범한 상가건물처럼 생겼습니다.
그래도 망치를 들고 왔으니 삼엽충 얼굴은 봐야겠죠? 철암역 부근 산에 직운산층이 일부 노출되어 있어서 화석을 볼 수 있습니다. 유난스러울 정도로 따뜻한 봄, 꽃길을 따라 걷습니다.
몇 채의 폐가옥을 지나 산으로 올라갑니다.
산길에 화석을 품은 돌이 굴러다니고 있습니다.
'바실리엘라 속(Basiliella sp.)' 삼엽충의 꼬리입니다.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인데, 삼엽충의 전체 모습과 더불어 몸이 조각조각 분리된다는 사실을 잘 모르면 자칫 조개화석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멋진 삼엽충이네요. 머리 쪽에 뾰족한 볼침이 없기 때문에 '바실리엘라 티피칼리스(Basiliella typicalis)'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쁜 삼엽충 얼굴도 보았으니 미련 없이 하산합니다.
좀 더 내려오면 구문소가 나옵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시간동안 흐르는 물이 바위에 커다란 구멍을 뚫었습니다. 구문소의 물은 꽤 깊습니다. 최대 수심이 18미터가 넘는다고 하죠. 용이나 이무기가 살았을 법합니다. 참고로 왼쪽에 있는 터널모양 굴은 일제시대에 길을 만들면서 인공적으로 뚫은 것입니다.
구문소 부근엔 태백고생대자연사박물관이 있습니다. 화석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이전에 여러 번 구경했죠. 나중에 이 박물관에 대한 상세한 글을 따로 게시할 예정입니다.
박물관 앞을 흐르는 이 물이 좀 전 보았던 구문소의 천연 굴을 만든 것이죠. 물의 힘이 대단한 건지, 세월의 힘이 대단한 건지~
고생대 지층과 함께 걷습니다. 한 발자국 이동할 때마다 10만 년씩 과거로 거슬러 갑니다.
박물관 위쪽으로는 직운산층이, 아래쪽으로는 막골층이 있습니다. 이곳은 천연기념물 제417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망치 들고 어슬렁거리기만 해도 오해를 살 수 있죠. 따라서 망치는 출동 금지~
직운산층 두족류 화석입니다. 오늘날의 오징어와 유사하지만 머리에 딱딱한 고깔을 쓰고 있는 형태죠.
지층에 대한 안내석도 세워 놓았습니다. 태백의 고생대 오르도비스기 지층을 오래된 순서대로 나열하자면 '동점규암', '두무골층', '막골층', '직운산층', '두위봉층'입니다. 이 가운데 직운산층에서 화석이 가장 많이 나옵니다. 동점규암을 제외한 다른 지층에서도 화석이 발견되기는 합니다만 직운산층만큼 다양하고 멋진 화석들이 다량으로 나오지는 않습니다. 이는 지난 게시글 '10회 특집, 고생대 화석 올스타전(https://brunch.co.kr/@paleo/55)에서 볼 수 있습니다.
두무골층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면 철암역 쪽에서 오는 철길과 교량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침 지나가는 열차는 봉화의 분천역과 태백의 철암역을 오가는 V-train 관광열차입니다. 예전에 한 번 타보았는데 너무나 친환경적이어서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여름엔 천장에서 돌아가는 선풍기로 더위를 참아야 하고, 겨울엔 난로로 추위를 이겨야 하죠. 그래도 멋진 경관을 볼 수 있는 협곡 열차입니다.
다리를 기준으로 왼쪽으로 가면 두무골층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동점규암입니다.
하천변에 노출된 두무골층의 모습입니다. 청색빛이 감도는 직운산층과는 색상부터가 다르죠. 이곳에서도 삼엽충을 비롯해 화석들이 발견됩니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삼엽충을 엄청 찾고 싶었나 봅니다. 삼엽충을 두무골층 바위에 귀엽게 그려놓았네요. 근데 삼엽충보다는 왠지 바선생 같은 모양새입니다.
태백에 사는 사람들은 겨울과 여름만 있다고들 말을 합니다. 그래서 봄과 가을이 참 귀하게 느껴집니다. 이 따뜻한 봄날, 이곳저곳을 여유롭게 거닐며 아름다운 경관을 감상하고, 삼엽충도 만나고, 사색에 잠길 수도 있어 참 좋은 하루였습니다. 이번 봄에도 또 이때와 같은 날을 태백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