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생대 마이오세 천곡사층
경주시는 생각보다 넓습니다. 동쪽으로는 바다에 크게 접해있고, 내륙 쪽으로도 면적이 상당하죠. 때문에 경주는 중생대와 신생대 지층이 혼재합니다. 그 가운데 신생대 굴화석이 다량으로 발견되는 곳이 있습니다. 지난번 '경주는 굴화석의 천국' 문무대왕면(https://brunch.co.kr/@paleo/47)에 이어 이번엔 천북면 용골계곡을 소개합니다. 이곳은 지금껏 보아왔던 모든 화석 산지를 통틀어 개인적으로 가장 신기한 곳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느낌마저 드는 곳입니다. 이번 탐사기는 봄과 겨울, 여러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것을 종합해 한데 엮어 보았습니다.
가족들과 경주를 자주 놀러 가곤 합니다. 경주에 가자고 하면 아이들은 경주월드나 카트체험 등을 떠올리며 신나지만 저는 화석 탐사할 생각에 신이 납니다. 오죽하면 한 겨울 혹한에도 경주에 놀러 갈 생각을 할까요? 일부러 화석산지 인근에 펜션이나 콘도를 잡아 광란(?)의 하루를 함께합니다. 좋아하는 취미활동을 위한 일종의 밑밥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다음날 새벽, 피곤할 텐데도 도둑놈처럼 혼자서 몰래 일어나 인근 화석산지로 냅다 달려갑니다.
모두가 잠든 이른 아침, 화석 계곡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날의 날씨가 어떤지 앞에 고드름이 말해주네요. 숨 쉬는 공기마저 쩍쩍 얼어붙을 만큼 겁나게 추웠습니다.
고드름의 길이가 사람 키보다 깁니다. 그 와중에 휘어진 고드름이 보이네요. 계곡을 따라 관통하는 매서운 바람이 만든 흔적이겠죠.
이 계곡을 따라 걸으면 가장 흔하게 보이는 것이 바로 굴화석입니다. 하지만 지난번 문무대왕면에서 보았던 길쭉한 형태의 굴 '크라소스트레아 그라비테스타 어일엔시스(Crassostrea gravitesta eoilensis)' 즉 길쭉이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대신 '크라소스트레아 그라비테스타 요코야마(Crassostrea gravitesta Yokoyama)' 즉 넙쭉이가 대부분이죠. 사실 먼저 소개해서 그렇지 길쭉이가 매우 귀한 화석이긴 합니다.
계곡을 걷는 내내 이처럼 굴화석이 무질서하게 뭉쳐진 전석이 계속 관찰됩니다.
자... 이곳으로 순간이동을 했다고 치고 눈앞에 보이는 많은 돌 중 굴화석이 있는 돌을 구분해 보십시오. 모르고 가면 모르겠지만, 알고 찾아가면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화석이 풍부합니다.
물가에 있는 돌뿐만 아니라 지층에 온전히 박혀있는 굴화석도 관찰할 수 있습니다.
흙속에 박힌 돌 같은 것들이 모두 굴화석입니다. 물론 모두 완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잘 찾아보면 괜찮은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층이 금세 무너질 듯 위태로워 보여 망치질하기는 상당히 부담스럽습니다. 당연히 저는 사진만 찍고 패스했습니다.
10여 분 이상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오른편에 굴화석과 이매패 화석이 빼곡히 박힌 지층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선명하지는 않지만 화석이 들어있는 층리를 알아보실 수 있는 독자님이 있으시다면 이미 전문가이십니다.
좀 더 쉬운 사진을 준비했습니다. 화석층이 확실히 구분이 되시나요?
특히 이곳 주위를 살펴보면 지층에서 떨어져 나온 전석에서 굴화석뿐만 아니라 다양한 연체동물의 화석이 관찰됩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600만 년 전 신생대 마이오세에 살았던 녀석들의 흔적입니다.
보기엔 대충 망치로 두들기면 뿅 하고 튀어나올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매우 단단해 만만치 않습니다. 이런 전석들은 그냥 구경이나 하고 사진이나 찍고 마는 게 정신건강에도 좋고 손발도 편합니다. 잘 찾아보면 깨끗하게 떨어져 나온 완전한 굴화석을 만날 수도 있으니까요.
계곡 상류에서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이제는 더 위로 올라가 봐야 화석층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다시 계곡을 따라 내려갑니다. 앞서 이 계곡의 이름이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시나요?
용골계곡이었죠. 용이나 이무기가 살았던 계곡에 그것이 지나간 흔적이 그대로 남았다고 붙은 이름입니다. 이름처럼 뭔가가 계곡을 훑고 지나간 흔적 같습니다.
정말 보면 볼수록 그 이름이 너무나 걸맞는다는 느낌이 듭니다.
사실은 흐르는 물이 오랜 세월 상대적으로 약한 지층을 깎아 차별침식으로 만든 자국이겠지만, 옛사람들은 여기가 용이나 이무기가 살고 있는 곳이라 이렇게 계곡이 만들어졌다고 충분히 믿었을 법합니다.
따뜻한 봄에 다시 찾은 용골계곡입니다.
해빙과 더불어 지층 일부가 무너져 내렸습니다. 무너진 곳을 잘 찾으면 쉽게 화석을 찾을 수 있습니다만, 아쉽게도 여기는 화석층이 없는 곳입니다.
하지만 용이 지나간 자리는 그대로 남아있네요. 볼수록 너무나 신기합니다.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가본 곳 중 가장 신비롭다고 느끼는 화석 산지입니다.
이곳을 천천히 걸으면 마치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아무도 가지 않았던 곳에 처음 발을 내딛는 기분마저 들고요. 우리나라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게 너무나도 기쁘네요.
역시나 이번에도 하천에 아무렇게나 구르고 있는 굴화석이 보입니다.
매우 큰 복족류 화석을 만났습니다. 소장하고 있는 모든 화석 도감을 뒤져봐도 정체를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화석이나 고생물 분야에서 연구가 안 된 부분이 꽤 많습니다. 뒤집어 이야기하자면, 이 분야에서 논문을 쓸 거리가 매우 많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앞에 보이는 큰 돌은 대부분 화석을 품고 있습니다. 역시 가장 흔한 것은 역시 굴화석이며 자세히 관찰해 보면 작은 이매패와 복족류가 가득합니다. 이 포인트만 자세히 구경해도 한 시간은 훌쩍 지나갑니다.
이곳이 얼마나 매력적인 화석산지인지를 잘 보여주는 증거죠. 눈 쌓인 겨울, 새벽에 또 출동했습니다.
하필 이 시기엔 경주에 수십 년 만에 어마어마한 폭설이 내렸었습니다. 폭설을 이기지 못하고 지붕이 무너져 내린 마우나 리조트 사건이 벌어져 많은 사람들이 사망한 큰 사고였었죠. 대학에 갓 입학한 새내기들이 꿈도 펼쳐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참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내렸던 눈은 대부분 녹아버렸지만, 계곡 입구에 서있던 대나무가 엄청난 눈의 무게를 못 이기고 그대로 쓰러진 채 그 엄청난 폭설의 위력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우와... 조금 더 오르니 대나무가 다 쓰러져 계곡입구를 완전히 막아버렸네요. 늘 그렇듯 저는 빠꾸를 모르는 상남자이므로 이곳을 질겅질겅 밟고 그대로 통과합니다. 물론 여러 번 자빠지고 미끄러졌습니다.
지옥의 대나무 덤불을 통과한 뒤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대체 눈이 얼마나 내렸길래 10m쯤 되는 꼿꼿한 대나무가 이처럼 누웠을까요? 부러질지언정 휘지 않는 대나무의 기개를 찬양했던 옛 글이 참 무색합니다.
조금 더 오르자 부러진 소나무가 더러 보였지만, 계곡은 기본 모습은 예전 그대로였습니다.
용과 이무기가 지나간 자리 역시 그대로네요.
너무 마음이 편안합니다. 다시금 느끼는 기분이지만, 먼 은하계 너머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에 온 것 같습니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온전한 나만의 세상 같다는 느낌입니다.
흐르는 계곡물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굴화석입니다. 화석은 볼 때마다 언제나 반갑습니다.
점토층과 사질층이 구분된 지층의 층리가 참 명확합니다.
매우 큰 넙쭉이가 마중을 나왔네요. 방가방가!
굴화석 가운데 동그란 구멍이 종종 보이는데 이는 돌이나 패각에 구멍을 뚫고 사는 갈매기 조개의 흔적입니다. 지난번 가리비 화석 편에서 소개했던 이매패이기도 하죠. 굴을 잡아먹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은신처를 만들기 위해 구멍을 파고 살아가는 것이죠.
상상이 되시나요?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계곡을 거슬러 오르면서 화석을 마주하는 느낌이 어떨지?
수많은 연체동물의 화석이 한데 뒤엉켜 있는 화석입니다. 얼마 전에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는 경주 내륙입니다. 오래전 이곳이 바다였다는 증거죠.
복족류 화석의 모습입니다.
복족류 화석의 모습입니다. 2
이 화석은 탄산칼슘으로 이루어진 외골격이 녹아버리고 내부 공간에 다른 물질이 남았습니다. 원래는 살아있을 때 살이 차 있었거나 죽고 난 후 빈 공간이었던 곳에 진흙 등이 들어가 이처럼 단단한 화석이 된 것이죠. 마치 용수철을 보는 듯합니다. '비카리아 속(Vicarya.sp)'으로 보입니다.
이매패 화석의 알맹이는 떨어져 나가고 그 몰드만 남았습니다. 화석에 남아있는 흰 부분은 아직 화석화가 덜 이루어져 손으로 만지면 밀가루처럼 부스러집니다.
겁나게 큰 굴화석(넙쭉이)입니다. 신생대 굴화석의 특징 중 하나가 매우 두껍다는 것이죠. 두껍다는 것은 살의 수율이 낮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껍데기는 커도 알맹이는 작으니 실속은 없었을 듯합니다. 그래도 그 맛이 해산물 마니아인 저로서는 적잖이 궁금하기도 합니다.
잘 찾아보면 이처럼 잘생긴 굴화석을 만날 수 있습니다. 크기가 큰 만큼 무게도 상당합니다.
굴화석을 잘라 현생종 중 큰 편에 속하는 바윗굴과 비교를 해보았습니다. 패각의 성장선과 패턴에서 유사함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위에 있는 잘생긴 굴화석을 자른 건 아닙니다.
이 이매패에는 가운데 구멍이 뚫려있습니다. 이는 이매패에 구멍을 뚫어 체액을 쪽쪽 빨아먹는 포식자 복족류의 식흔입니다. 즉 이 이매패는 화석이 되기 전 이미 무지개다리는 건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곳에서는 이와 같은 식흔 화석이 종종 발견됩니다.
굴과 이매패, 복족류가 혼재된 암석입니다.
이 또한 구멍을 파고 사는 갈매기 조개의 흔적입니다.
확실히 요즘 굴과 비교했을 때 매우 큽니다. 너무 무거워 몇 개 가져오기도 부담스러울 정도입니다.
이날 가장 큰 행운은 완전한 굴화석의 쌍을 발견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경주 지진 때 무너져 내린 지층 덕분이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굴화석이 흔하다고는 하나 완전한 제짝을 그대로 발견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이 화석은 위아래 두 패각이 한치의 오차없이 완전한 짝을 이루는 쌍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안에 들어있는 살의 부피나 모양을 비교적 정확히 유추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매우 의미있는 화석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짝을 맞추면 이처럼 완벽하게 맞아떨어집니다.
돌아가는 길, 아까의 그 대나무 지옥을 자근자근 밟으며 통과하고 나서 차를 탔는데 뭔가 허전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제 분신과도 같은 망치가 없어졌다는 걸 알게 되었죠. 분명 대나무 밭을 통과하기 전엔 있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습니다. 집에 여분의 망치가 하나 있긴 했지만, 처음 화석과 인연을 맺게 해 준 망치가 사라졌다니 도저히 그대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사랑하는 가족을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죠. 결국 다시 계곡을 올라 이리저리 동분서주하다가 대나무 사이에 떨어져 있던 망치를 기적적으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마치 이산가족이라도 상봉한 것 같은 기쁨이었습니다.
비록 무생물이지만 '내가 미안하다. 앞으로는 더 신경 쓸게'라고 망치를 어루만지며 차에 올랐습니다. 나중에 제가 죽으면 관짝에 부장품으로 함께 넣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