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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삼엽충 화석을 찾아서(하)

고생대 캄브리아기 마차리층

by 팔레오

밭에 흩어져 있는 돌을 들추자 무려 5억 1000만 년 전에 살았던 삼엽충 화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510,000,000년...


대부분 100년도 못 사는 짧은 인간의 삶으로는 쉽사리 체감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시간이다.

1년에 1원씩 저금해서 5억 원짜리 아파트 한 채를 사는 것에 비유하면 좀 더 체감이 될까?


결국 우리는 죽을 때까지 100원도 못 모으고 가는 짧은 삶이다.



큼직한 전석에 프로세라토파기 렉티스피나타(Proceratopyge rectispinata)를 비롯해 여러 삼엽충의 두부와 미부가 보인다. 이 작은 돌에 박혀있는 삼엽충들은 모두 5억 원짜리 아파트를 구매하신 분들이 되겠다.



너비가 약 2cm가량인 선명한 삼엽충의 미부다.

마차리층 삼엽충은 종류가 너무 많은 데다 공부도 부족해 잘 모르는 부분이 많으므로 이름을 전혀 알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때문에 절로 겸손해지는 곳이 이곳인 듯하다.



마차리층에서 가장 흔한 삼엽충은 물에 떠다니며 살았던 부유성의 아그노스투스속(agnostus sp.) 삼엽충이다.



Hughes et al. (2008) 논문 삽화

이 녀석 또한 상편에서 소개했던 글립타그노스투스 레티쿨라투스(Glyptagnostus reticulatus)처럼 몸을 접어 방어자세를 취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런 부유성 삼엽충으로 알려진 것들이 삼엽충과 무관한, 계통이 다른 생명체라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마차리층에서 이런 부유성 삼엽충은 매우 흔하다. 다만 두부와 흉부 미부가 모두 붙어있는 온전한 것은 매우 드물다.



이번엔 어마어마하게 많은 삼엽충 화석이 밀집된 셰일판을 발견했다.

대충 보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겠지만...


자세히 확대해 보면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다.



확대사진 #1

다양한 종류의 삼엽충 탈피각들이 한데 뒤엉켜 있는 모습이다.



확대사진 #2



확대사진 #3



얼핏 체절이 있는 흉부를 기준으로 위아래가 완전 대칭인 것처럼 보이지만, 잘 보면 두부와 미부의 모양이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좀 더 각지고 복잡한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미부다. 이 작은 셰일판에 엄청나게 많은 화석이 박힌 까닭은 아마도 삼엽충의 탈피각들이 조류에 의해 한자리에 모인 다음 매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빙겔라속(Irvingella sp.) 삼엽충의 두부



역시 어빙겔라속의 화석



머리 아래쪽이 길게 뻗어 나와 어빙겔라와 조금 다른 모습의 이오추앙기아 하나(Eochuangia hana)



두장의 패각을 가지고 있는 이매패(조개류)와 비슷하지만 이것은 패각이 하나인 단판류의 화석이다. 정확한 학명은 알 수 없다. 아무튼 여기서는 삼엽충보다 훨씬 귀한 화석이다. 아마도 고생대에 단판류는 삼엽충만큼 크게 번성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마차리층 삼엽충 중 크기로 치면 끝판 대장격인 하니와이데스 콘카부스(Haniwoides concavus)의 미부 화석이다. 삼엽충마다 다르긴 하지만 보통 전장이 미부의 3배 정도이니, 이 화석이 완전한 상태였다면 대략 12~15cm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니와이데스 콘카부스의 흉부 가운데 떨어져 나온 축엽 하나만 남아 화석이 되었다. 좌우 길이가 약 5cm가량으로 상당히 큰 편이다. 두부 흉부 미부가 온전히 붙어있는 하니와이데스 콘카부스의 완전한 화석은 박물관이나 책, 논문에서조차 아직 본 적도 없고 소문조차도 들은 적 없다.



거의 완전한 반원의 모양을 한 삼엽충의 선명한 미부화석



속명과 종명을 동정하기 어려우나 삼엽충의 예쁜 미부 화석들이 계속 발견된다.



그러다가...

이미 갈라진 얇은 셰일판을 책장을 펼치 듯 무심코 열어보았는데...


마치 모기처럼 매우 작은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크기가 0.5cm 정도로 작아 육안으로 볼 때는 정체를 알 수 없었으나, 사진을 찍어 확대를 해보니 두부와 흉부 미부가 모두 붙어있는 완전한 형태의 삼엽충 화석이었다. 흉부에서 수염처럼 길게 늘어진 늑구가 매우 개성적인 이 삼엽충의 이름은 제고로바이아 코니카(Jegorovaia conica)다. 매우 드문 삼엽충으로 웬만한 논문이나 도감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영월은 태백과 지리적으로 매우 가깝다. 그런데 영월에 주로 분포하는 영월층군과 태백에 주로 분포하는 태백층군과는 큰 차이가 있다. 같은 시기에 쌓인 지층을 대비해도 공통적으로 산출되는 삼엽충이 단 하나도 없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는 고생대 시기에 두 지역이 지리적으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음을 시사한다.


영월에서 만난 숱한 삼엽충들의 흔적 속에서, 내게 찾아온 작은 생명체는 5억 년이 넘는 시간을 달려 이어진 기적처럼 느껴졌다. 겨우 몇 십 원 밖에 모으지 못한 찰나와 같은 인생 주제에 상상도 못 할 장구한 시간의 한 조각을 품을 수 있었던 건 정말 감사하고 황송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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