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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된 선택은 천국행

애기무덤과 엽전줍줍

by 팔레오

작은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고갯길은 지금까지도 살아남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군 단위 고을과 고을을 연결하는 큰 옛길은 근대화를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포장도로가 생겨 사라지는 경우가 많죠.


하지만 가끔은 큰 옛길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허구헌날 눈 빠지게 옛 지도를 보다가 그런 길을 발견하고 유레카를 외칩니다. 그럼 뭐다? 가즈아~



파란 선이 옛길이고 빨간 별이 고개 정상, 즉 최종 목적지입니다. 다행스럽게도 고갯길을 비켜서 현대의 도로가 나있습니다. 여기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오갔던 옛길입니다. 1번 코스로 접근하는 것이 가장 가깝지만, 등고선 간격이 매우 좁습니다. 평면상의 거리가 100m 정도인데 등고선 높이가 120m라는 것은 무려 45도가 넘는 급경사라는 뜻이죠. 상남자 싸나이를 눈물 많은 소녀로 만드는 위험한 길입니다. 접근 불가!


따라서 멀리 돌아가는 길이긴 하지만 안전한 2번 능선 코스로 접근을 시도합니다.



편안한 능선길을 따라 걷는데 안개가 밀려옵니다. 신기하게도 안개가 자욱한 날에는 소리조차 안갯속에 흡수되어 파묻히는 느낌입니다. 마치 아무도 없는 콘서트홀을 걷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죠. 산에서 혼자 걷다가 그런 느낌이 들면 섬뜩해서 자동으로 걸음이 빨라집니다. 생각해보니 시간 단축하는 긍정적 측면이 있기도 하네요.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주변이 온통 돌밭입니다. 이 부근에만 돌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오래전에 돌무더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1960~70년대 미신타파를 국가 정책으로 시행하기도 했었습니다. 전국에 수많은 서낭당을 때려 부수었죠. 어쩌면 여기 돌무더기도 그때 허물어서 이처럼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탐지 영상입니다. 클릭~

오랜만에 vegas를 사용했는데, 죄다 까먹고 겨우 자막 넣는 것만 기억나네요.



돌 밭 한가운데 돌무더기가 있는데, 딱 봐도 서낭당 돌무더기와는 느낌이 다릅니다. 비슷한 크기의 돌을 원형으로 잘 쌓았고 가운데가 움푹 꺼진 것이 돌무덤으로 짐작됩니다. 규모가 작은 것으로 보아 아기나 어린아이 무덤이 아닐까...



동영상에 나온 오늘의 첫 엽전입니다. 상평통보 당이전입니다. 포인트에서의 첫 엽전은 의미가 큽니다. 왜냐면 옛길임을 인증하는 것이고 또한 더 많은 엽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죠.



바로 옆에서 또 하나 나왔습니다. 그런데 常(상) 위에 점이 보입니다. 이를 음성표라고 하는데 주전소나 기타 어떤 구분을 위해 만들었다는 설이 있는데 확실히 검증된 바는 없습니다. 엽전 몇백 개 중 하나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드문 케이스입니다.



돌을 한 두 개만 들추면 엽전이 나타나네요. 엽전을 캔다기 보다 그냥 줍는다는 말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편안한 등산길에 여기저기 흩뿌려진 엽전, 여기가 바로 천국입니다.



돌 사이로 삐죽 얼굴을 내민 이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철마입니다. 호랑이로부터 지켜달라고 천마를 형상화해 주술적 의미를 담아 묻어놓은 것입니다. 지난 글에서도 초미니 철마가 한번 나왔었죠. 그보다는 좀 더 크지만 모양이 형편없습니다. 요즘 초등학생을 데려다 만들어도 이보다는 더 잘 만들 듯합니다. 하지만 이건 쇳물을 부어 만드는 것이라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푸드트럭처럼 전국을 순회공연하는 대장장이가 만든 것입니다. 논문에 그렇게 나와 있더라구요.



진휼청에서 만든 상평통보 당이전입니다. 가장 흔한 당이전이지만 서체가 아름답고 잘 만들어져 가장 상평통보다운 상평통보입니다. 그래서 이걸 열쇠고리나 USB메모리에도 달아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엽전은 사랑입니다~♡"



호조에서 만든 상평통보 당일전입니다. 오른쪽에 월표가 있죠. 당일전은 당이전보다 작으며 더 후대에 만들어졌습니다.



상평통보를 많이 접하다 보면 앞면 사진만 봐도 당일전인지 당이전인지, 당오전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좀 더 공부하면 뒷면을 보지 않고도 어느 주전소인지 대강 알 수 있습니다. 이건 뒷면을 보나 마나 진휼청에서 만든 당이전입니다.



제가 특히 좋아하는 말방울이 나왔네요. 오래전 이 고갯길로 말을 끌고 다닌 사람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방울을 딸랑거리며 고개를 지나갔을 말이 떠올라 잠시 상념에 빠집니다.



총융청에서 만든 당이전 천자문전 '荒(황)'입니다. 진휼청이나 호조 당이전보다는 귀합니다. 더구나 글씨도 선명합니다. 보기 좋게 푸른 녹이 생겼구요. 아주 좋습니다.



철마도 있지만 드물게 도자기로 된 말도 있습니다. 유약까지 바른 고오급 '도기마(陶器馬)'네요. 다리 한 짝만 남겨두고 본체는 어디 갔을까요? 금속이 아니라서 탐지가 안되니 몸통은 결국 찾지 못했습니다. 어딘가에 분명 있을 텐데 참 안타깝습니다.


혹시 "내 다리 내놔~"하고 몸통이 집으로 따라오면...

그럼 땡큐죠~


다리 : (감격스러워 하며) "날 구해주러 왔구나!"

몸통 : (고개를 떨구며) "아니, 나도 잡혔어!"



도제마 yahoo_co_jp_20210824_234145.jpg

완전체 였다면 아마 대략 이런 형태로 생겼을 듯 합니다. 일본옥션에 나온 도기마입니다. 너무 예쁘게 생겨 입찰을 했는데 결국 제가 낙찰 받았죠.



엽전이 끝도 없이 나옵니다. 덕분에 앉았다가 일어났다가를 수도 없이 반복하니 허리가 쑤시네요. 그래도 행복한 비명이자 짜릿한 통증입니다.



스머프처럼 새파란 녹청이 생긴 엽전입니다. 이를 어떤 사람들은 솔로 박박 문질러 없애는데, 그냥 가볍게 흙만 제거해서 보관하는 게 더 예쁩니다.



철마가 또 나왔네요. 역시나 아주 성의 없게 생긴 철마입니다. 이 못생긴 말을 보니 시정마가 생각나네요. 보통 잘생긴 종마가 암말과 교미를 하는데 까탈스런 암말이 뒷발 공격을 하면 귀한 종마가 다칠 수 있으므로, 먼저 못생긴 시정마를 투입해 암말을 살살 흥분시킵니다. 그러다 암말이 준비(?)가 되면 시정마는 끌려 나가고 종마가 들어옵니다. 이 때 끌려나가지 않으려고 시정마는 난동을 부리는데 그 광경이 매우 처절하다 하지요. 맞으면서 끌려나가는 시정마의 비명이 그렇게 구슬프다 합니다. 허허~


역시 사람이든 말이든 일단 잘생기고 볼 일입니다.



한참 엽전을 줍고 있는 데 멀리서 인기척이 느껴져 보니 등산객 차림의 남자였습니다. 보통 산에서 사람을 마주치면 가볍게 인사정도는 하는 게 국룰이죠. 먼저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했는데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뭐 저런 사람이 다 있나 싶어서 잠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보니 그 등산객이 보이지 않습니다. 분명 아주 짧은 시간이었는데요. 안개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고 보기에도 말이 안 되는데...


실없는 소리가 아니라 진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습니다. 산에서는 가끔 말이 안 되는 일이 종종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오늘의 수확물입니다. 과장 좀 보태면 주머니가 두둑해지다 못해 터질 지경입니다.



흔한 일제시대 동전도 없이 10원짜리 한 개 빼고 모두 엽전입니다. 일제시대 이전에 이미 다른 길이 나서 이쪽으로는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았다는 뜻이 되겠네요. 또한 엽전의 반이상은 큼직한 당이전입니다. 당이전이 당일전보다 더 오래전에 주로 쓰였으니 그만큼 이 고갯길이 유서 깊은 곳이라는 의미겠죠.



다시 안개가 짙어지고 있습니다. 몇백 년 동안 땅속에 잠들어있던 귀한 엽전을 내어준 이 고갯길이 고맙네요. 엽전을 남겨주신 조상님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가면서 몇 번이나 뒤돌아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안녕~ ㅇㅇ고개

안녕~ 애기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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