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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엔 금속탐지를 떠나야 해

감성과 호주머니를 채우다

by 팔레오

완연한 가을입니다.

가을의 산은 단풍이 들어 참 아름답습니다. 눈이 즐거운 산행을 할 수 있는 이 좋은 시기를 놓칠 수는 없죠.

특히 옛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면서 가을의 정취와 낭만을 만끽하고 싶어 탐지기를 꺼내 산으로 출발합니다. 그리고 엽전도 주울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죠.



구름도 쉬어간다는 해발 1,353m 두타산의 위압감이 실로 대단합니다. 사진으로는 그 느낌이 제대로 표현되지 않네요. 옛날 조상님들은 저렇게 높고 험준한 곳을 매번 걸어서 어찌 넘어 다녔는지 참 대단합니다.



샤를르 뜨레네(Charles Trénet)의 '가을의 노래(Chanson d'automne)' '와 이브 몽땅(Yves Montand)의 '고엽(Les feuilles mortes)'을 들으며 멋진 단풍과 함께 하는 드라이빙은 낭만 그 자체!



전망이 끝내주는 곳에 잠시 멈춰 서서 멀리 보이는 도시와 바다를 조망해 봅니다. '동산에 오르니 노나라가 작아 보이고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작아 보였다.(登東山而小魯 登太山而小天下)'는 공자의 말이 떠오르네요. 멀리 동해 바다와 삼척항이 한 손에 쥐어지는 듯 합니다.



사각사각 낙엽 밟는 소리를 들으며 걷는 옛길!


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가련한 낙엽이 되리라

가까이 오라, 벌써 밤이 되었다

바람이 몸에 스민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레미 드 구르몽(Rémy de Gourmont)의 시가 절로 나오는 길이네요.



오래된 빈병이 눈에 들어옵니다.

입으로는 고상한 시를 읊으면서, 손으로는 넝마주이처럼 빈 병을 줍습니다.


"시몬! 너는 아느냐? 빈 병 줍는 재미를~♪"


마치 공포영화에서 잔잔한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고 사람을 죽이는 사이코 살인마를 보는 듯합니다.


이건 대략 50년이 넘은 오래된 소주병입니다. 소주병이라고 다 같은 소주병이 아닙니다. 기다란 파이프에 녹은 유리를 붙이고 사람이 직접 입으로 불어서 만든, 일명 불어병이라고 하죠. 불어병의 특징은 병의 두께가 일정하지 않고 다소 두꺼우며 공기방울이 보인다는 점입니다. 희소하므로 일반병보다는 더 비쌉니다. 중고로운 평화나라에 팔면 만 원은 충분히 넘는 물건이므로 일단 챙깁니다. 만약 산에 만 원이 떨어져 있다면 줍지 않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요?



별을 닮은 예쁜 꽃이 보입니다. 마지막 잎새처럼, 최후의 열매가 하나 남아 있네요. 마치 "나 좀 먹어 봐! 맛있어"라고 제게 속삭이는 듯합니다. 귀가 솔깃해져 맛이 무척 궁금했으나 요즘 다이어트 중이라 참기로 합니다. 사실 뭔지도 모르고 먹으면 저 세상 다이어트를 할지도 모르겠네요.



옛길 옆으로 집터만 남은 곳에 석축이 보입니다. 이런 석축을 보면 궁금해서 일단 탐지기를 들이대곤 합니다. 늘 기대감을 갖게 하지만 실상 석축에서 크게 재미를 본 적은 없습니다. 이번에도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10원짜리 하나만 나오네요. 기껏 찾아낸 동전이지만 다시 제자리에 묻습니다. 다음 탐지하시는 분이 있다면 덜 심심하라고~


하지만 이번에도 수줍게 속내를 고백하자면, 이를 주워 흙을 털고 주머니에 챙겨 넣는 운동에너지 비용만큼의 가치도 없어서라는 게 팩트입니다. 팔레오 인성 무엇?



왕복 2시간 동안 유서 깊은 옛길을 힘들게 걸었으나 실속은 크게 없었네요. 칼, 화살촉, 비녀, 美군복 단추 3개, 걸쇠, 상평통보 2개가 전부입니다. 그래도 길이 너무 예쁘고 분위기도 좋았기에 10점 만점에 9점!



붉고 노란 단풍이 하늘을 덮어 작고 푸른 호수를 만들었네요.

아아.... 메마른 감정의 소유자인 저로서도 그만 감성충이 되어버리지 않고는 못 배기겠습니다.



감성지수를 풀로 채우고는 고지대에서 한참을 내려와 다음 포인트에 왔습니다. 작은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고갯길입니다. 여기는 아직 단풍이 내려오지 않았네요.



대놓고 밖에 나와 일광욕을 하고 있는 상평통보네요. 보통 시간이 지나면 땅속에 묻히는 것이 당연한데 어떻게 밖으로 나왔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방울 좋아하는 건 어찌 알고 작은 고갯길이 말방울 하나를 내어주네요. 취향을 제대로 저격할 줄 아는 고갯길입니다.



살짝 묻혀있던 옛날 과자봉지입니다.

롯데 딱따구리라... 뒷면을 보니 1975년 제조된 10원짜리 과자인데, 언제까지 팔렸는지는 몰라도 사 먹은 적도 본 기억조차 없네요. 그런데 50년이 다 된 과자봉지 치고는 상태가 참 좋습니다. 이런 봉지도 전문적으로 모으는 수집가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단 또 챙깁니다. 매번 이러니 집에 쓰레기 가져온다고 등짝을 맞죠.



역시 작은 고갯길답게 나온 물건도 소박합니다. 왼쪽 위에 있는 물건은 말편자를 고정하는 편자못입니다. 일반인에게는 매우 생소한 물건이지만 금속탐지를 하다 보면 자주 만날 수 있습니다. 말방울과 마찬가지로 말이 지나다녔다는 걸 알 수 있게 해주는 유물입니다. 하지만 철재질이라 부식이 심하고 흔해서 크게 가치는 없습니다.



다음 고개로 왔습니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있는 멋진 고갯길입니다. 글에서는 순간 이동한 것처럼 빨리 장면 전환이 되지만, 실제로는 차량 이동 시간이 제법 됩니다. 그리고 꽤 걸어야 하지요.



큰 나무 옆에서 신호가 잡혀 보았더니 우와~ 은목걸이가...

아니라 스텐 재질의 줄이네요. 잠시 심쿵했습니다.



역시 이 고개도 시작부터 선뜻 엽전 하나를 내어줍니다. 엽전이 어디 있을까요? 숨은 그림 찾기입니다.



겨우 엽전 한 개가 뭐냐며 산신령에게 더 달라고 떼를 쓰니 선심 쓰듯 딱 3개를 더 내어주고는 이제 그만 내려가라 합니다. 나중에 살펴보니 오른쪽 위에 있는 당이전은 전라감영에서 만든 천자문전인데 뒷면에 '黃'이 있는 귀한 것으로 도감가가 무려 20만 원짜리였습니다. 흔한 엽전 수십 개보다 더 낫네요.


"그래서 그렇게 겨우 4개만 주고 내려가라고 큰소리치셨구나!"



인근에 있는 다음 고개로 왔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인적이 끊긴 지 얼마나 오래되었을까요? 고갯길 주위로 잡목이 무성합니다. 이제 조금만 더 자라면 그나마 남아있는 길의 흔적마저 완전히 사라질 듯합니다.



"산신령님, 한 푼 만 줍쇼~"

"옛다~"



또 나옵니다.

우와, 이건 엽전 두께가 장난이 아니네요. 엄살 좀 보태자면, 무거워서 꺼내다 하마터면 어깨 탈골될 뻔했습니다. 이렇게 두꺼운 엽전을 후전(厚錢)이라고 합니다. 희소하므로 더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후전은 주물이 과도하게 들어가 일반적으로 글씨가 뭉개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건 상평통보 4글자가 선명하고 테두리도 반듯합니다. 모전을 가지고 처음에 만든 초주전(初鑄錢)으로 보입니다.



역시 뒷면까지 선명합니다. 여러 글자와 기호가 보이죠? 훈련도감에서 만든 당일전입니다. '훈생 좌오 우월표'라고 읽습니다.



금위영에서 만든 중형전 '한(寒)'입니다. 오른쪽에 월표도 보이네요. 중형전은 당이전과 당일전의 중간 크기입니다. 구리를 아끼려고 당이전 이후에 조금 더 작게 만든 건데, 서체가 예쁘고 선명해 인기 있는 상평통보입니다. 오늘도 행복하네요.


그러나 행복했던 시간도 잠시, 대형사고가 터집니다. 탐지기가 갑자기 꺼져버렸습니다. 다시 켜니 배터리 경고가 뜨고 또 꺼집니다. 생각해 보니 지난번 사용하고는 충전을 하지 않았네요. 하아~

금속탐지기는 USB-C타입이 아니라서 전용줄이 있어야 보조배터리로 충전을 할 수 있는데, 그걸 가지고 다니지는 않으니 딱히 방법이 없습니다. 아쉽지만 이곳은 다음에 다시 오기로 하고 하산합니다.



시간도 남았겠다. 돌아가는 길에 아까 지나가면서 보았던 서낭당이 궁금해 둘러보기로 합니다. 서낭당은 근래에 다시 지은 것으로 보이나 큰 서낭목과 주변에 크게 쌓은 돌이 범상치 않아 보입니다. 역사 있는 서낭당 자리인 듯합니다.



"실례합니다!" 하고 조심스레 문을 열어보니 '태백산 성황당 신위'라는 위패가 있습니다. 태백산 성황신을 모시는 신당이네요. 깨끗하게 정돈된 것으로 보아 마을에서 종종 제를 지내나 봅니다. 아주 오래전에는 성황당에 철마를 봉안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성황당과 서낭당은 같은 의미로 사용합니다만, 약간의 차이는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신당을 차린 곳은 성황당이라고 하고 신당 없이 돌이나 나무만 있는 곳은 서낭당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런 거지 엄격히 구분해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가을, 멋진 단풍 구경도 하고 감성도 가득 채우고 귀한 엽전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탐지기 배터리만 아니었다면 퍼펙트한 하루였네요.


오늘 제 점수는요. 10점 만점에 9.9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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