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력의 한계는 없다
시간순서가 엉망이 되었습니다. 봄에서 가을로, 다시 봄 탐사기입니다.
이번에도 저 멀리 바다가 보이는 백두대간의 고갯길로 방향을 잡아 아침 일찍 길을 나섰습니다. 오늘은 무려 여덟 고개를 탐사할 예정이라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네요. 과연 체력이 과연 버텨줄지 살짝 걱정도 되지만 기대감도 큽니다.
아래로 영동고속도로와 멀리 바다가 보입니다. 높은 곳에서 탁 트인 산과 바다를 바라볼 때마다 호연지기가 절로 생기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호연지기를 고작 돈 줍는 원동력으로 바꿔 사용한다는 게 좀 우습긴 합니다.
첫 번째 포인트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임도가 막혀있네요. 요즘 산불조심기간이라 입산금지된 곳이 많아 세심하게 검색해 보고 왔어야 했는데 낭패입니다. 여기서 1~2km만 차로 가면 바로 고갯길 포인트를 볼 수 있을 텐데 안타깝습니다. 어쩔 수 없죠. 오늘 가장 기대가 되는 포인트였지만 다음을 기약하고는 회군합니다.
그래도 실망하기엔 이릅니다.
이에 버금가는 두 번째 포인트가 있으니 그리로 가면 되지요.
그런데 이게 또 웬일인가요? 두 번째 포인트도 임도가 막혀있습니다.
폰을 켜서 확인해 보니 분명 입산금지지역으로 뜨지 않는 곳인데 이게 대체 어찌 된 것일까요?
하아~ 한숨이 나옵니다.
애초의 계획이 시작부터 빗나가니 왠지 오늘은 빈손으로 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차를 돌려 세 번째 포인트에 당도했습니다. 가운데 낮은 곳이 고갯마루인데 밭이 새로 개간되면서 평탄화되어버렸습니다. 탐지기를 들고 가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네 번째 포인트에 왔습니다. 순간이동 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하산하고 차에 짐을 싣고 출발하고 주행하고 다시 짐을 꺼내고 산을 오르는 시간이 제법 됩니다. 그 시간만큼 속도 새까맣게 타들어가네요.
여기는 고개 정상이 너무 넓고 평평합니다. 너무 넓어 쉴 곳이 많으면 돌무더기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탐색 범위가 너무 넓어 흘린 길전조차도 찾기 어렵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오라는 엽전은 안 나오고 아주아주 험한 것이 나왔습니다. 악마의 제초제 그라목손이네요. 그라목손은 우리나라 업체에서 붙인 이름이고 본래 이름은 파라콰트라고 합니다. 한 모금만 마셔도 "너는 이미 죽어있다"입니다. 폐를 섬유화 시켜 서서히 죽게 만드는데 해독제도 전혀 없습니다. 끔찍한 고통을 느끼며 죽기 전까지 정신은 말짱하다죠. 너무 위험한 농약이라 이제는 생산이 금지되었습니다.
병이 조금 깨져있긴 하지만 아직 약이 조금 남아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득 냄새는 어떨까 하는 위험한 호기심이 생기네요. '냄새 정도 맡는 거야 괜찮겠지'하고 병을 집으려는 순간, 다음 연재를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참았습니다.
옛길에서 다소 벗어난 곳에 작은 돌무더기가 보입니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 탐지기를 대보았으나 조용합니다. 지난번 보았던 것과 같은 애기무덤인 것 같네요. 무서엉~
결국 여기서도 땡전 한 푼 못 줍고 에너지와 시간만 낭비했습니다. 아까보다 더 속이 타들어간 채 터덜터덜 산을 내려옵니다.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운동이 좀 되긴 했네요.
다섯 번째 포인트에 왔습니다. 공사판이 벌어졌네요. 화석탐사에서는 '공사판=화석판'이지만, 금속탐지에서는 '공사판=개판'입니다. 탐지기 들고 지나가니 공사하던 아저씨들이 일제히 동경의 시선으로 쳐다보는 듯합니다. 하긴 제 탐지기가 좀 튀는 고오급 에디션이라 시선을 끄는 게 당연할지도 후훗~
고갯길 끝에 올라보니 중장비 캐터필러 자국 천지에 흙더미도 어지럽게 쌓여있습니다. '오늘은 왜 이리 운수가 안 좋을까?'
기운도 빠지고, 배도 고프고, 기왕 올라온 길이니 여기서 점심이나 먹고 내려가기로 합니다. 이번에도 점심은 산에서의 주식이 되어버린 발열밥입니다만 오늘따라 밥맛이 형편없습니다. 아마도 기분 탓이겠지요. 모델 제의도 안 오는데 자꾸 광고해 주는 것 같아 사진은 생략합니다.(엽전 못 찾은 화풀이)
지나가는 길에 산불로 만신창이가 된 산이 보입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많은 인건비를 들여 산불감시원을 두고 다소 불편해도 입산금지기간을 정해두는 게 이해가 갑니다. 절대 산에서는 담배를 피우거나 버너로 밥을 하고 그러면 안 되겠습니다. 지난번에도 이야기했는데, 금속탐지하면서 산에서 버너로 고기 구워 먹고, 라면 끓여 먹고는 버젓이 그 사진을 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진짜 거 너무한 거 아니오?"
산불조심 표어가 하나 생각납니다.
'산불로 잿더미, 나는야 빚더미'
산불을 내면 형사처벌은 물론 막대한 민사상 배상책임도 따릅니다.
밥도 먹었겠다. 심기일전하고 여섯 번째 포인트에 당도했습니다. 여기는 시작부터 복분자인지 뭔지 모를 자잘한 가시덩굴이 유난히 많아서 옷이 찌익~찌익~ 긁히는 소리를 내도록 들으며 고개에 올랐습니다. 덕분에 바지가 다 망가졌네요. 얼마 전에도 지옥행 코스에서 상남자 코스프레 하다 옷이 다 망가졌는데, 새 바지를 산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망가졌네요.
"아~~~~~~~~~~~~!!!"
드디어 오늘 첫 엽전을 봅니다.
몇십 개씩 엽전이 쏟아져 나올 때 "또야?", "응 네 다음 엽전~"했던 오만방자함을 반성합니다. 별 것 아닌 엽전 한 개가 조급함으로 가득했던 마음을 확실히 풀어주네요.
이어지는 귀하디 귀하신 엽전님입니다!
엽전 어르신, 문안드리옵니다.
제 공손함에 감동을 받았는지 여기저기 지체 높으신 엽전님들이 옥체를 드러냅니다. 오늘은 엽전님이 등장하실 때마다 왠지 머리라도 조아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건... 오래된 반지인 줄 알았으나 MG50 탄피를 잘라 만든 반지로 보입니다. 여자들이 군대 간 남친한테 젤 받기 싫은 선물이 탄피나 탄두로 만든 액세서리였다고 하죠. 요즘은 군인 월급이 많이 올랐으니 주얼리 가게에서 반지를 사주지 예전처럼 청승맞고 힘들게 이런 걸 만들진 않을 듯합니다.
파란 녹이 가득한 엽전님들의 등장입니다. 하도 파래서 스머프인 줄 알았네요.
이 포인트의 대미를 장식한 엽전님이라 특별히 로우앵글로 피날레를 장식해 보았습니다.
평소보다 양은 적을지라도 다른 때보다 더 의미 있고 귀한 오늘의 결과물입니다. 엽전이 뭐라고 사람의 마음을 이리도 갈대처럼 흔드나뇨?
아까보다는 편안한 마음으로 일곱 번째 포인트에 왔습니다. 골을 따라 올라가면 되는데 여기도 덩굴이 많아 지름길이기도 한 왼쪽 급경사를 기어올라가기로 합니다.
우와~ 경사가 장난 아닙니다. 여기서 까딱 잘 못 구르면 시지프스의 돌처럼 바닥까지 굴러내려 가겠네요.
무사히 고갯마루에 다다르니 엽전이 먼저 마중을 나옵니다.
'금속탐지인이 산에 가면 먼저 가있던 엽전이 마중을 나온다고 한다. 나는 이 이야기를 무척 좋아한다.'
오랜만에 곰방대가 나왔습니다. 머리 부분인 '대꼬바리'입니다. 대꼬바리가 나왔다면 주변을 더 샅샅이 수색해야 합니다. 짝을 이루는 '물부리'가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죠.
역시 가까운 곳에서 물부리가 나와줍니다.
완전한 제짝입니다. 오래되어 대나무로 된 연관(燃管)인 '설대'는 썩어 없어졌죠. 그래서 이를 복원해 보기로 합니다.
잠시 타임슬립을 했습니다. 야산에 흔한 대나무, 특히 검은 대나무인 오죽을 찾아 적당한 것을 잘랐습니다.
햇빛에 충분히 건조시킨 다음 불로 달구면서 모양을 반듯하게 잡고,
적당한 길이로 잘라 설대의 앞뒤를 살짝 깎아내면,
완성입니다. 오죽의 색과 잘 어울리네요. 위의 갈고리 같은 것은 대꼬바리의 담뱃재를 긁어내는 '담배침', 혹은 '담배후이개'라고 하는 물건입니다. 백동재질에 조선시대 것인데 금속탐지로 찾아냈죠.
다시 금속탐지로 시간이동합니다. 완전체 곰방대가 또 나왔습니다. 이번엔 나무로 된 설대 일부가 썩지 않고 남아있네요. 시중에 파는 곰방대는 대부분 가짜입니다. 한 가지 진품 구분 팁이라면, 대꼬바리 위에 흠집이 많은 것이 진품입니다. 진짜로 사용했던 곰방대는 담뱃재를 털어내느라 습관적으로 땅바닥에 탁탁 내리쳤기 때문이죠. 그리고 속에 시커멓게 찌든 때와 찌꺼기가 붙어있습니다.
예쁜 곰방대 두 세트와 엽전을 만났으니 급경사 고개를 오른 보람이 있네요.
오늘도 여러 곳을 누비며 함께한 나의 <2021 Equinox800 Ssaguryeo Limited Edition> 금속탐지기
"수고했어, 오늘도!"
돌아가는 길에 마지막으로 한 군데 더 들러봅니다. 여덟 번째 포인트네요.
여기도 엽전님이 마중을 나오셨네요. 이렇게 의도적으로 구멍을 낸 엽전은 대들보에 붙인다고 상량전(上樑錢)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확실히 검증된 바는 없습니다.
마지막 포인트에서 길전 4개를 추가하며 오늘의 여덟 고개 대장정을 끝냅니다. 길쭉하니 요상하게 생긴 건 돌인데 꽤 무겁고 부딪치면 쇳소리가 나서 일단 챙겨 보았습니다.
여덟 군데 포인트를 모두 둘러보고 돌아가는 길,
지금까지 하루에 가장 많은 포인트를 다녔던 날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길고도 힘든 여정이었으나 이를 받쳐주는 체력이 참 대견합니다. 또한 각각의 포인트에서 연속으로 꽝을 치면서도 굴하지 않는 마음도 대견합니다.
금속탐지가 힘들어도 언제나 그 즐거움은 한결같습니다.
그곳엔 산이 있고, 고개가 있고, 엽전님이 있고, 옛이야기가 있고, 나의 건강이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