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글에서 내 회사 생활에 몇 번의 시련이 있었다는 것을 짧게 언급한 바 있다. 불행히도 난 그 시련들을 지혜롭게 넘기지 못하고 모두 정면으로 맞고 좌절했던 경험만 가지고 있다. 조금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실패의 체험들이었다.
다행히도 이런 실패들을 겪으면서 나름 교훈도 얻고 성장도 하였다. 각각의 사례들이 갖는 교훈이 다 다른 것을 보니 그래도 학습능력이 없지는 않은 것 같다.
첫번째 사례는 상사와의 업무 스타일이 맞지 않아 생긴 문제였다.
내가 첫 직장에서 만난 첫번째 상사는 덕이 많은 분이셨다. 포용력이 뛰어났고 주변의 말에 귀기울일 줄 알았다. 덕분에 쉽게 회사에 적응 할 수 있었다. 경력이 일천한 나에게 어떤 일을 맡기면 잘해낼 수 있을까 고민해서 일을 주셔서 나름 성장할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이분이 건강 이슈로 갑작스레 자리에서 물러나며 후임으로 오신 분은 성격이 전혀 달랐다. 매우 직설적이고 급한 성격이었고 지시에 따르는 것을 좋아했다. 워낙 성격이 급하다 보니 나와 그분 사이에 또 다른 상사가 있음에도 직접 나에게 지시를 할 정도였다. 결국 두 상사의 눈치를 보다가 일이 지연되었고 이 때문에 성격 급한 상사에게 찍히고 말았다. 상명하복에 빠른 일처리를 좋아하는 분이 보기에는 내가 일을 뭉게고 지시를 어기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결국 다른 팀으로 옮길 수 밖에 없었다.
그때는 매우 억울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너무 안이했었다. 상사가 바뀌면 바뀐 상사의 업무 스타일에 따라야 한다. 나는 상사를 바꿀 수도 상사의 성격을 바꿀 수도 없다. 그리고 회사 생활의 제 1원칙은 상사와 척지지 않는 것이다. 상사가 노력을 한다고 해도 나를 키워주는 것은 장담할 수 없지만, 상사가 내 앞길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조금 과장해서 백가지도 넘는다. 상사에게 아부하라는 것이 아니다. 상사를 거스르지 말라는 것이다. 상사의 스타일이 있다면 그에 맞추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이다. 그분은 그런 방식으로 그 자리까지 올라갔다. 그 방식이 나름의 성공 방식인 것이다. 지금에 이르러 보면 정말 다양한 상사를 만났다. 어떤 상사는 하나하나 지시하는 것을 좋아하고 다른 상사는 알아서 잘하는 것을 좋아한다. 어떤 상사는 신중하게 접근하는 것을 좋아하고 어떤 상사는 일단 움직인 후 상황에 맞게 대응하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일하는 방식이 상사와 잘 맞으면 좋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다. 그럼 상사에게 맞추는 것이 편하다.
내가 만약 그 때로 돌아간다면 아마 지시한 것을 최대한 빨리 이행하고 보고하는 길을 택할 것이다. 상명하복을 좋아하는 상사는 어떻게 보면 정말 편한 상사다. 보통 이런 유형은 자신이 지시한 것만 이행하면 일이 잘못되어도 화를 내지 않는다. 내 말을 따르라고 하는 유형은 보통 내가 책임 진다는 것을 전제로 일을 시키기 때문이다. 물론 가끔 있는 지시를 내리고 책임을 지지 않는 상사를 만난다면 답이 없다. 최대한 빨리 도망쳐라.
두번째 사례는 내가 리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 생긴 문제였다.
이동한 조직에서 한동안 혼자 일을 했지만 내 성과에 만족한 리더가 나에게 파트 하나를 맡겼다. 20명이 넘는 파트원을 이끄는 리더가 된 것이다. 나는 공장 특유의 경직된 문화가 싫었다. 부하직원과의 유대도 없이 끊임없이 밀려오는 일에 치여 건조하기 짝이 없는 관계만이 있는 회사생활이 너무 삭막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나름 파트원들과 좀 더 부드러운 관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의 의견을 많이 들으려고 노력했고, 반영하기 위해 노력했다. 과중하게 들어오는 타부서의 업무 협조는 쳐내기도 하고 가끔 이로 인해 다른 파트장과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회사에서 일은 계속 생기고 이것을 누군가는 해치워야 한다. 이번에 내가 했으면 다음에 누군가 해주기도 하고 서로 협력해야 끝나는 일도 많다. 내가 우리 파트원들의 편의를 위해 풀어주자 남은 일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일은 언젠가는 해치워야 하는 일들이었다. 이렇게 방만하게 조직을 운영하다 결국 새로운 리더에 의해 좌천되고 만다. 물론 그 리더와 업무 스타일이 안 맞는 것도 원인 중 하나였지만 결국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리더의 역할을 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깨달은 것은 내가 파트장에서 물러나고 좀 시간이 지난 후였다. 새로 온 파트리더는 파트원들을 무자비하게 굴렸다. 다른 부서의 협조요청까지 더해 일을 분배했고 과중한 업무에 파트원들은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한두달이 지나자 전체 일의 양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다른 부서와 업무가 원활하게 흘러가 불만 또한 줄어들었다. 나는 파트원의 업무를 줄이기 위해 업무를 쳐냈는데 업무를 잘 하는 리더는 일 자체를 줄였다. 나는 무능한 리더였던 것이다.
내가 인간적으로 잘 대해주었던 파트원들은 나를 그리워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좋은 리더는 일을 잘해서 일 자체를 줄여주고 주변에서 인정받게 해주는 리더였다. 회사는 친목의 장소가 아니다. 회사는 일을 하는 곳이다. 구성원은 일을 하기 위해 모였다. 물론 서로서로 친하게 지내는 것이 회사생활 하는데 훨씬 좋다. 그러나 서로 친하게 지내는 것이 주가 되어서는 회사생활이 무너지게 된다.
회사는 일하는 곳이고 일을 잘 해내는 조직 즉 성과를 내는 조직을 만드는 것이 리더의 임무이다. 나는 이 교훈을 실패로부터 배웠다.
세번째 사례는 회사에서의 연구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져서 생긴 문제였다.
이직 후 나는 다시 연구분야의 업무를 맡게 되었다. 5년 정도 팀원으로 일하면서 몇 가지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해 나갔다. 나름 팀 내 파트 리더로 과제의 방향을 정하고 리딩하는 경험도 쌓았다. 그리고 새로운 과제를 제안하는 기회를 통해 신규 과제를 론칭하고 착실하게 준비해서 정식 과제화에 성공해 팀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 과제는 시작한지 5년만에 중단되고 만다. 물론 큰 틀에서 보면 회사 연구 과제 리빌딩의 일환으로 진행된 것이지만 내가 조금만 더 잘 대응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많았다. 회사에서의 연구는 사업화를 목표로 한다. 사업화란 제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고 결국 누군가 내가 만든 제품을 사야 사업화에 성공할 수 있다. 내가 연구한 제품은 기술적으로 흠잡을데 없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사업부에서 물어오는 “그래서 누구에게 얼마나 팔 수 있나요?”라는 질문에는 명확하게 답변할 수 없었다. 동일한 제품이 없어 비교가 어렵다는 핑계를 댔지만 실은 이 제품을 꼭 필요로 하는 고객을 찾을 수 없었다.
“좋기는 한데 실적이 없네요.”
“가격은 얼마나 하나요?”
“실제 제품으로 만들었을 때 물성이 잘 나온다는 증거가 있나요?
고객들은 끊임없이 질문했고 나는 이들의 니즈를 모두 대응하지 못했다. 그리고 고객을 명확히 하라는 사업부의 요구에 약간의 귀찮음 마저 느꼈다. 내심 “이렇게 좋은 물건인데 사는 사람이 없겠어?” 라는 안이한 생각을 했다. 하지만 결국 사겠다는 사람은 없었고 과제는 중단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살 것이라고, 원할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실제로 나는 한 명의 고객도 확보하지 못했다. 미래에 줄 서서 기다릴 백명의 고객, 천명의 고객도 모두 내 상상 속에만 있었다. 지금 한명의 고객이 없다면 열번째 고객도 백번째 고객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연구자의 마인드로 연구자를 만족시키는 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실패했다.
회사에서의 연구는 결국 고객이 기꺼이 지갑을 열 수 있는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목표이다. 연구하고 있는 것이 팔리지 않는 제품이 된다면 그것이 아무리 대단한 것이라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
회사생활을 하는 동안 또 어떤 실패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난글에서 쓴 것처럼 실패를 통해 배우는 것도 있다. 실패를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실패했다면 뭐든 그것에서 얻을 것을 찾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최소한 다음에 똑같은 이유로 실패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