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일요일 글 하나씩 올리기로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고 브런치 업로드를 시작한지 10개월이 다 되어간다. 9개월을 잘 지키던 이 약속이 10월들어 결국 깨지고 말았다. 뭐 변명을 하자면 미친 듯이 밀려오는 보고서의 홍수에 휩쓸려 모든 기운이 빨린 나머지 주말이면 반쯤 생명이 꺼진 좀비가 되어 지냈기 때문이다. 물론 미리 미리 비축분을 쌓아두고 이런 일을 대비했어야 하지 않냐고 준엄하게 꾸짖을 분들도 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변명을 하자면 사실 9월달을 그 비축분으로 근근히 버텼었다. 극강의 J인 나는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강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1,2주 정도 준비로는 만족치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고서의 쓰나미는 나를 그로기 상태로 몰고 갔다. 남들 쉬는 주말에도 보고서를 쓰기 위해 비척비척 회사로 향해야 했으니 중년의 약골 회사원의 체력이 남아 있는 것이 비정상일 것이다. 뭐 세상 일이 예측되로 된 적이 몇번이나 있겠는가?
우리회사는 10월이면 모든 보고가 끝난다. 그러니까 모든 1년의 성과를 10월이면 마감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11월말 임원인사로 반영된다. 임원진의 보고가 10월에 완료된다는 이야기는 나 같은 팀장의 결과 보고는 9월에 끝나야 한다는 것이고 그 말은 남들 여름휴가로 즐거울 시절에 나는 이미 일년의 성과를 정리하는 보고서를 쓰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8월말부터 10월첫주까지 중요 임원진에 대한 보고가 이어졌다. 사업부서의 사업부장, 사업본부장에 대한 보고 연구조직의 연구소장, CTO에 대한 보고 그리고 끝판왕 CEO 보고까지. 그렇다 올해 그리 보고에 치인 이유는 내가 만날 수 있는 모든 높으신 분들에게 보고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CEO 보고는 회사생활 20년 넘게 한 나도 이번 보고 포함 4번밖에 안해본 흔치 않은 이벤트이다.
모든 보고에는 보고서가 필요하고 모든 보고서는 관련된 실무진들과 협의가 필요하다. 괜히 엉뚱한 내용이 들어가서 논란이 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또 보고 받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들어가는 내용이 달라진다. 결국 같은 내용을 여러 버전으로 만들어야 하니 심히 극한 작업이라 할 만하다.
보고서 하나를 작성하고 실무진 미팅하면 수정할 것이 생긴다. 이것을 상사에게 보고하면 또 수정할 것이 생긴다. 그리고 더 위의 상사에게 보고하면 또 수정할 곳이 생긴다. 문제는 모든 코멘트를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부분은 상충하기도 한다. ‘아! 나보고 어쩌라고.’ 성질대로라면 볼펜이라도 집어 던지고 싶지만 어쩌겠는가? 이런 저런 내용을 반영하다 보면 보고서 제목 끝에 붙은 ‘아무게 과제 보고_v1’은 어느새 v10을 넘어가게 되고 처음 내가 썼던 보고서는 물속에 녹아 든 설탕마냥 그 흔적을 찾기 힘들게 된다. (물론 설탕이 들어갔으니 설탕물 맛이 나듯 중요 내용들이야 살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내용들을 반영하면서 본문 내용이 2~3페이지 안에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극강의 요약을 하면서 들어갈 내용은 모두 들어가야 하고 읽는 사람에게서 질문이 나오지 않을 만큼 명료해야 한다는 것이 ‘필수’ 사항이다. 이 무슨 곡예인가? 마치 500원을 주고 편의점에서 사발면과 삼각김밥을 사오고 100원을 남겨오는 정도의 난이도라 할 수 있겠다.
물론 20년이 넘게 회사 보고서를 쓰면서 어느 정도 단련이 되어 이제 조금은 익숙해 졌지만 여전히 보고서 쓰는 것은 어렵다. 내가 말하는 보고서는 회사에서의 보고서 이다. 물론 학창시절에 쓰는 '리포트'도 영어를 번역하면 한국어로 ‘보고서’가 될 수 있겠지만 학창시절 쓰던 리포트는 보고서와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회사 다니시는 분들은 뭐 그런 당연한 것을 이라며 끄덕끄떡 하시리라.) 학창시절 쓰는 리포트는 교수님이 내준 문제에 대한 답변으로 많은 자료를 검색하여 찾고 나름 논리적으로 정리하면 훌륭한 리포트가 된다. 그러니까 단순한 정보의 수집과 재배열 속된말로 짜집기 정도로도 나름 훌륭한 리포트를 만들 수 있다. 회사 초년생들이 하는 가장 흔한 실수가 보고서를 학교 리포트처럼 써오는 경우인데 100퍼센트 Reject이다.
리포트와 다르게 보고서는 목적이 있고 보고받는 주체가 정해져 있다. 그러니까 보고 받는 주체가 관심이 있는 내용을 적어서 납득시키고 설득하는 것이 목적인 서류이다. 정보만 전달해서는 원하는 반응을 얻어내지 못한다. 예를 들어 내 상사인 연구소장님이나 그 위의 CTO는 이 연구가 어떤 기술적 진보와 차별점이 있는지 특허는 얼마나 확보했는지 그래서 경쟁 회사, 경쟁 기술보다 우위에 있는지 등이 관심사이다. 이를 통해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은? ‘이만큼 괜찮은 기술이니 다음 과정으로 나가게 해주세요.’ ‘조금 더 밀어주세요.’ ‘비용이나 투자도 좀 해주시고 사람도 늘려주시고’ 등등. 결국 과제의 존속과 더 나은 투자를 위해서는 이러한 점을 잘 부각 시켜야 하는 것이다. 사업부나 사업본부와 같은 사업조직은 이 과제가 향후 어떤 사업적 임펙트를 줄 수 있는지 즉 얼마나 돈이 될 수 있는지가 관심대상이다. 그러니 이쪽 보고에는 향후 이 과제로 얼마나 큰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지 성장성은 얼마나 큰지 어떤 제품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CEO쯤 되면 전사 전략과 향후 미래 전략에 잘 align이 되어 있는지 궁금해 할 것이다.
이렇게 보고받는 사람도 제각각이고 알고 싶은 내용도 제각각이면 동일한 과제에 대해서도 다양한 보고서를 만들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보고서를 쓰다 보면 과제도 3차원의 존재처럼 느껴진다. ‘무슨무슨 과제’라고 부르지만 여러 개의 면을 가지고 있어서 필요할 때마다 그 면을 보여준다. 정육면체에는 6개의 면이 있고 정팔면체에는 8개의 면이 있듯이. CEO가 보고 싶은 면이 3번째 면인데 당신이 공돌이들이 좋아하는 5번째 면을 보여준다면 CEO는 아마도 ‘그래서 도대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야?’ 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CEO는 알고 싶은 것을 알지 못하게 되고 당신은 당신이 얻고 싶었던 CEO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과제는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뭐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보고는 누구에게 하는지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어쩌다 “좋은 보고서는 어떻게 쓰나.” 로 주제가 샜다. 눈치 채셨겠지만 이 긴 이야기는 결국 내가 한달 반 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래서 브런치를 2주나 쓰지 못할 수 밖에 없었다는 구구절절한 변명이다. 앞으로는 2달치 비축분을 만들어 놓도록 하겠다. 근데 어느 세월에 그걸 만들지 매우 걱정이다. 암튼 초심으로 돌아가 업로드 펑크 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 (근데 내가 2주 연재 쉰 것을 알아차린 사람이 몇 명이나 될지 심히 궁금하다. 한 명도 없을 수도 있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