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너무나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어서 방향이 조금만 틀어져 버려도 어느새 전혀 다른 곳에 도달해 버리고 만다. 약간의 예측 오류에도 우리는 방향을 잃고 표류하게 된다.
우리의 부모세대와 조부모 세대는 그렇지 않았다. 어제 했던 일이 오늘로 이어지고 오늘 한 일이 내일로 이어졌다. 미래는 과거와 현재의 연장선이고 죽 그어진 그 직선 위에 삶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내일 어디에 있을지 우리의 윗세대 처럼 예측할 수 없다. 이처럼 예측 불가능하고 예측이 쉽게 벗어날 수 밖에 없는 시대에 '불안'은 불가피 하다. 불안은 유동하는 미래 위에 있다.
예측이 불용한 시대에 불안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완화시킬 수 있을 뿐이다.
첫 번째, 능동적인 방식은 빠르게 적응하는 것이다. 어차피 예측이 어려우니 방향이 바뀔 때마다 그 방향에 맞게 나를 바꾸는 것이다. 이 방법의 부작용은 항상 예민 해야 하고 어느 순간 나의 방향이라는 것이 사라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 의지로 키를 잡고 항해하는 것이 아니라서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표류하는 배와 같아지는 것이다.
두 번째, 수동적인 방법은 변화의 방향에 개의치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변화를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조금 둔감하게 받아들인다고 할까? 어떤 변화에도 “아. 이렇게 변했구나.”하고 한 템포 늦게 반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삶의 방법도 이런 방향도 있구나 하고 알면 된다. 그 후 따를지 그렇지 않을지는 천천히 결정하는 것이다. 이 방법의 단점은 시대에 뒤쳐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변화에 따른 스트레스가 적으니 덜 불안하고 어찌 되었든 모든 판단의 중심에 내가 있을 수 있다.
첫 번째 경우는 변화를 수용하는 방식에서는 ‘능동적'이지만 결과를 받아들이는 방식에서는 ‘수동적’이다. 반대로 두 번째 경우는 변화를 ‘수동적'으로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받아들이지만 결과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자신이 선택할 수 있으니 ‘능동적’ 이라고 할만하다.
어떤 방식으로 변화에 대응할 지는 본인의 취향과 가치관에 따라 다를 것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30대 까지는 시대의 변화에 촉각을 세우고 빠르게 따르는 쪽이었다. 실제 성격 자체가 조금 예민한 면이 있고 불안을 못 견디기 때문에 더욱 더 빨리 변화에 올라타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이런 삶은 피곤하기 짝이 없다. 항상 신경을 날카롭게 벼루고 있어야 하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그래서 40대에 이른 지금은 조금 둔감 하려고 노력한다. 변화가 왔을 때 조금 더 지켜보려고 노력한다. 어쩌면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금 늦게 따라가도 괜찮다는 지혜를 얻어서 일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이제 어느 정도 불안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맷집이 늘어서 일수도 있다. 열심히 노를 저어 간 곳이 전혀 엉뚱한 곳인 것 보다는 조금 천천히 둘러보다 가는 것이 낫다는 어린 시절 경험이 마음속 여유를 강제로 주입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나이가 들면 점차 보수적이 된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지 않은 사람이 어찌 속단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보수라는 것이 젊은 시절에는 부정적인 의미를 많이 내포하고 있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조금 느린 템포로 또는 지금의 내 템포를 유지하며 가는 것 이는 진보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조금 더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천천히 변화하려는 모습 이것이 보수라면 나는 점차 보수적이 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