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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십대 회사원 김씨 Mar 04. 2024

희망에 의지하지 않고 세상을 직시하는 인간

시지프 신화 -  알베르 카뮈

- 사진 : 티치아노 작 Sisyphus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는 제목과는 상관없는 부조리와 희망에 대한 길고 지루한 글을 읽어나가야 마침내 마지막 장에서 시지포스와 마주하게 된다. 

- 사진 출처 : 교보문고


 왜 카뮈는 책 제목을 시지프 신화로 하였을까? 왜 이 짧은 이야기를 제일 마지막에 배치하였을까? 책을 읽는 내내 집중과 산만을 오가던 나는 이 마지막 장을 읽으며 오랜만에 뒤통수가 심하게 얼얼해지는 경험을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시지포스가 굴러 내려간 돌을 바라볼 때 그가 시련과 시련 사이에서 담담한 눈길로 새로 시작되는 시련을 바라볼 때 나는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 

아! '희망' 없이 이 세상을 지그시 응시하는 인간이란. 


 우리는 모두 시지포스와 같다고 생각했기에 카뮈는 그를 소환했을 것이다. 우리는 매일 반복되는 일에 매달려 있다.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간다. 그러나 우린 시지포스와 다르다. 우린 열심히 목적을 가지 돌을 꼭대기로 굴려 올린다. 꼭대기는 우리의 목표다. 우리는 그 꼭대기에서 성취의 달콤함을 얻을 것이라 기대한다. 목표 달성, 성취, 성과 우리 모두가 향하는 곳이다. 그곳에 이르면 행복할 것이라고 만족할 것이라고 ‘희망’한다. 

 그러나 삶의 부조리는 우리가 힘겹게 도달한 그곳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힘겹게 도달한 곳에서 밀어 굴러 떨어뜨리기 일수다. 다시 시작점으로, 나락으로 밀쳐 낸다. 우리는 아연히 굴러 떨어진 우리의 운명을 보며 절망한다. 그렇다. 우리는 ‘희망’하였기에 ‘절망’하고 만다. 


그렇다면 다음은? 둘 중 하나다. 

 다시 ‘희망’을 가지고 돌을 굴려 올리는 것 또는 이 세상의 실체 부조리를 깨닫고 ‘절망’ 속에 자살에 이르는 것이다. 


 시지포스는 제 3의 길을 간다. 그는 과감히 희망을 폐기한다. 그 앞에 주어진 돌을 외면하지 않는다. 이 세상을 가득 메우고 있는 부조리를 응시한다. 묵묵히 돌을 굴려 올린다. 그리고 최종 목적지에 꼭대기에 도달했을 때 다시 굴러 떨어지는 돌을 그저 바라본다. 


 그가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은 여기에 있다. 

그는 돌이 결국 굴러 떨어질 것을 안다. 부조리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음을 아니 그의 삶 자체가 부조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중단하지 않는다. 그래서 굴러 내려간 돌을 응시하고 묵묵히 다시 내려간다. 

나는 이 대목에서 울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 일을 해낸다. 어떠한 불만도 희망도 없이. 이것이 우리가 삶을 대하는 진정한 태도가 아닐까?


 부조리한 삶을 직시하고 살아가는 것. 카뮈는 이를 반항하는 인간이라 했던가? 진정한 반항은 돌을 올리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비참한 운명을 '부조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해내는 것 바로 그것이다. 신은 그가 절망하기를 그 부조리함에, 자신의 비참한 운명에 울부짖기를 바랐지만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이, 이 세상이 온통 부조리로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희망에 의지하지도 않고 자신의 의지로 모든 것을 수용한다. 신이 원했던 대로 희망으로 스스로를 속이기거나 절망 속에 신에게 의지하거나 신의 자비를 구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신에 대한 반항인 것이다. 신의 의지가 아닌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는 반항하는 인간인 것이다. 세상의 진정한 모습을 직시하는 인간. 부조리한 그 진실을 파악하고도 이를 받아들이고 묵묵히 살아내는 인간. 시시포스. 카뮈가 사랑한 진정한 인간의 모습이고 내가 살아가고 사랑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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