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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팰럿Pallet Jun 09. 2020

아버지의 초코파이와 꽈배기

문득 떠오른 아버지의 마음

보통의 남자들은 초코파이를 즐겨 먹진 않는다.

군대에서는 사회에 대한 갈증과 향수로 초코파이를 많이 찾고 먹었겠지만.. 사회로 돌아와서는 웬만해선  찾지 않는다.

나의 경우는 초코파이를 잘 먹지 않는 이유가 좀 다르다. 그 이야기를 하자면,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로 돌아가야 한다.


난 어린 시절을. 그러니까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3학년 때까지의 시절을 어느 깊은 시골에서 십리길을 등하교하며 자연을 벗 삼아 보냈다. 아버지는 농부였고, 어머니 역시 농부의 아내였다. '시골'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꼭 따라오는 반대말이 하나 있는데, 바로 '읍내' 다. 그만큼 '시골'은 우리의 인상 속에, 나의 기억 속에 슈퍼에서 살 수 있는 공산품, 도시에서 편하게 접하는 문화 시설들과는 동떨어진 공간이었다. 실제로 내가 살았던 시골 역시 그랬다.

아버지는 가끔 '읍내'에 나가셔서 농사에 필요한 물품들. 일 년에 열 번도 넘는 제사에 필요한 것들. 그밖에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구매해 오셨다. 버스는 하루에 여섯 대 정도 다녔는데, 버스 오는 소리만 들리면 나는 귀를 쫑긋하고 녹이 슨 철대문이 열리는 소리를 반겼다.


아버지는 한쪽 손에는 내 기억 속에는 중요하지 않은 물건을 들려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열두 개가 들어있는 한 박스의 초코파이가 있었다. 초코파이는 정말 도시의 맛이었다. 난 그 이후에도 '초코'를 좋아했다. 사십이 넘은 지금까지도 말이다. 하지만, 초코파이는 즐기지 않는다. 이유는, 아버지는 그 이후로도 내가 서울로 전학을 와서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초코파이를 종종 사 오셨기 때문이다. 초코파이가 더 이상 집 안에서 보이지 않았던 시점은 내가 직장인이 되었던 2000년대 후반 어느 시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집에 일찍 들어오는 날이 줄어들고, 더 이상 보살피지 않아도 스스로 돈을 벌고 쓰는 직장인이 되자, 어머니의 핀잔 속에서도 웃음으로 무마하며 사 왔던 초코파이는 볼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이렇게 끝나면 감동이 약간 있겠지만, 아버지는 그 이후에도 종목을 바꿔서 다시 도전하셨다. 기억나는 것은 내가 결혼하고 부모님과 집살이를 할 때, 집 근처 골목시장의 꽈배기였다. 아버지는 퇴근하실 때마다 그 꽈배기를 사 오셨는데 이젠 우리가 아니라 주로 어머니와 아내에게 고 계셨다. 어머니는 여전히 핀잔이 가득한 얇고 날카로운 눈빛을 주셨고, "아무도 안 먹는데 왜 자꾸 사와" 라며 꽈배기가 든 검정 비닐봉지를 식탁 위에 매몰차게 던져두시기도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의 꽈배기를 사실 좋아하셨다. 입이 아주 심심하실 때만.


나 역시 그 꽈배기를 좋아했다. 20대 후반. 일에 치이며 저녁도 제대로 못 먹고 집에 들어오던 길에 그 꽈배기 집에 들러 사 먹는 천 원에 3개 꽈배기는 주린 배를 채우기엔 그만이었고, 간식으로도 좋았다.

아내는 우리 어머니와 비슷했다. 막 튀겼을 때는 맛있지만, 조금만 지나도 딱딱해져 버리는 시장 꽈배기의 투박함과 거칠게 참 많이도 붙어 있는 하얀 설탕 가루들을 싫어했다.



미안하다. 어렵고 힘든 시절. 좋은 간식이라곤 '초코파이' 밖에 모르시던 아버지. 집으로 오던 가벼운 발걸음과 양 볼에 가득 머금은 미소를 제대로 봐 드리지 못한 게 미안하다. 그리고 그 초코파이. 흔해빠진 초코파이라고 아무도 먹지 않으면 "이렇게 맛있는 것을!" 이라면서 하나씩 드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애써 못 본 척했던 나를 참 숨기고, 지우고 싶다.


아버지는 일과는 땔 수가 없는 인생을 살아왔다. 일 없이는 건강할 수 없는 분이다.

나이 칠순이 넘으신 아버지는 여전히 서울 목동의 30년도 넘은 아파트에서 경비 일을 하고 계시다. 그것도 십 년이 넘게 이어가고 있다.


예전에 형과 함께 아버지가 일하시는 아파트에 방문할 일이 있었다. 경비실에 없던 아버지를 찾기 위해 전화를 하며 아버지가 쉬시는 공간에 갔는데, 휴대폰도 잘 터지지 않았다. 그곳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뒤편의 공간이었다. 그 쉼터는 곰팡이의 퀴퀴한 냄새와 그늘로 채워져 있었고, 아버지는 그 공간 옆에 초코파이와 검정 비닐봉지로 잘 묶어 두었지만 무엇인지 충분히 알만한 그 간식을 한켠에 두고 계셨다.

알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저런 거 드시지 마시고, 맛있는 간식 드시라고 하고 싶었다. 쉬는 곳이 왜 이래요, 이제 그만 일하셔도 되잖아요 라고 말하고도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아버지에게 삶은 성실하게 하루하루 일하는 즐거움과 가족이었는데 가족이 일을 하지 말라고 하고 쉽게 뒤돌아가면 아버지의 삶을 부정하는 아들의 자국만 남게 되는 것 아닌가.


나도 아버지처럼 치열한 젊은 시절을 보냈고, 열심히 일을 하고 아끼며 저축을 했다. 그리고 가정을 꾸렸고,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내를 맞이하고, 금쪽같은 딸을 얻었다.

나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초코파이를 사지 않는다. 꽈배기도 사지 않는다.

그저 딸과 아내와 함께 손잡고 걷고, 이야기하고, 장난치며 시간을 많이 보내려 하고 있다.


전하고 싶었던 마음. 터놓고 말하기에 어색하셔서 하지 못했던 그 이야기를

초코파이와 꽈배기가 없어도 할 수 있게 해 주신 아버지.

그게 아버지가 나에게 초코파이와 꽈배기로 가르쳐주신 아빠의 모습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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