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은 서울의 오래된 주택에서 살고 계신다. 언덕바지에 경사가 높아 걸어 올라가기에도 차로 올라가기에도 쉽지 않은 곳이다. 이웃 주택 사람들도 그렇고, 우리 부모님도 그렇고 다들 옥상과 마당에 이것저것 많이들 키우신다. 어느 집은 닭을 키우고(새벽에 수탉이 운다. 정말 놀랍다.), 어떤 집은 텃밭을 하고, 어떤 집은 꽃나무와 과실수가 가득하다. 부모님도 옥상에 꽃 화분들과 채소들을 큰 화분 여러 개에 나눠서 심으시는데, 작년에는 그 화분에서 나오는 것들로 김장을 다 하실 정도였다.
가끔 형네 가족과 누나네 가족이 모이면 아이들은 방에서 놀다가, 옥상에 올라가 화분들과 주변의 도구들을 가지고 우당탕탕 뛰어 논다. 우당탕탕 소리를 거실에 앉아서 듣노라면 아이들이 어디에서 어디로 뛰어가는지 알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던 아이들이 순간 조용해지고 또 환호성을 질렀는데, 무슨 이유일지 궁금하긴 했지만 굳이 올라가 보진 않았다. 오랜만에 모인 가족들의 입은 누가 쉴틈을 주지 않고 이야길 이어갔기에, 나 역시 그 흐름에서 밀리고 싶지 않았기에 아마 더욱 그랬던 것 같고, 아이들도 아이들끼리 그런 상황이겠거니 생각했다.
얼마 후 아이들이 손에 잡고 내려왔던 건, 아주 작은 달팽이 한 마리였다. 채소 가게에서 산 배추 사이에서 나온 적도 있고, 딸과 공원이나 들판에서 놀다가 만나기도 했던 그런 평범한 달팽이였다.
어떻게 만난 거야?
옥상의 벽에 매미 허물처럼 붙어 있길래 뜯어보았더니 살아있는 달팽이였단다. 아주 작고 약한 움직임에, 딸과 조카들은 '살려야 한다'는 마음으로 물을 뿌려주었고, 깜짝 놀란 달팽이가 생기를 보이자 다들 그렇게 환호를 했다고 한다.
살려야 한다 명주 달팽이
달팽이가 차를 타고 집으로 왔다
부모님 댁에서 다시 집으로 오는 날.
딸은 나에게 달팽이를 키워도 되냐고 물어봤다. 사실 그때까지도 난 달팽이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않았다. 달팽이가 뭐 달팽이지. 특별할 게 없으니까.
그렇게 달팽이는 우리와 함께 차를 타고 집까지 왔다. 아내는 제대로 된 넓은 플라스틱 용기로 집을 만들어 주었고, 뚜껑에는 작은 구멍도 몇 개 뚫어서 숨도 잘 쉬게 해 주었다. 아내는 검색을 좀 해 보더니, 그 녀석이 토종 달팽이인 '명주 달팽이'라고 말해 주었다.
보통 아이들이 무엇인가 키우자고 하면 결국에는 아이의 엄마나 아빠가 키우는 것이 정설이다. 학계의 정설은 우리 집에도 여지없이 통하였고, 아내는 아침마다 화분에 분무해주던 스프레이로 이제 팽이의 집 안도 습기 유지를 위해 분무를 해주고 있었다. 아참. 그래도 딸내미가 이름은 지어줬다. 팽이. 아주 단순하다. 상상력은 1도 없는 이름. 팽이.
달팽이의 냠냠 소리
엘리자베스 토바 베일리라는 작가가 있다. 베일리는 희귀병으로 20년 넘는 시간을 힘들게 보냈는데, 그중 1년의 시간. 달팽이와 함께한 1년의 시간을 기록하여 '달팽이 안단테(The Sound of a Wild Snail Eating)'라는 제목으로 엮어 냈다.
작가는 희귀병으로 몸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어 침대에만 누워 있는데, 친구가 선물해준 제비꽃 화분 속에 달팽이를 발견하게 된다. 작가는 화분에 제비 꽃잎 중에서도 시든 꽃잎만 먹는 달팽이를 보며, 이 작은 미물도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데, 자신은 비관 속에 살고 있음에 반성한다. 고요하고 고요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듣게 된 달팽이의 냠냠 소리. 책 자체가 주는 힐링과 삶에 대한 성찰도 참 좋지만, 한편으로는 달팽이의 냠냠 소리가 정말 궁금해졌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아침마다, 그날의 채소 껍질을 주며 먹는 달팽이에게 귀를 기울여 보았다. 물론, 아무런 소리를 듣지는 못했다. 하지만 하루는 양배추, 하루는 오이, 하루는 당근 등 주는 채소에 따라 달리 반응하는 팽이를 보고 있자니 왠지 진짜 무엇인가 사랑으로 키우는 느낌이 들었고, 잘 키우고 싶었다.
"잘 키우면 5년 정도 산대."
아내가 검색해보더니 말해 줬다. 5년이라. 놀라웠다.
정말 5년 정도 키워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 정도 키우면 딸도 중2병에 걸려서 아빠랑 잘 안 놀아줄 텐데, 달팽이랑 그때까지는 지낼 수 있을지도 몰라하는 생각도 들었다.
똥은 어디에 싸니
그렇게 거의 3주가 넘게 달팽이를 돌봐주고 있다. 이제 처음 데려왔을 때보다 1.5배는 커졌고, 먹성도 더 좋아졌다. 그렇다 보니 대변도 꽤 많이 싸고 있는데...
달팽이는 진화가 좀 잘못되어서(?) 대변을 달팽이집 안에 싼다고 한다. 그럼 그게 밀려서 아래로 내려온다고 한다. 아기 때는 집이 거의 없으니 똥꼬가 아래쪽에 있는데, 크면 클수록 항문이 달팽이집 안으로 말려들어가서 머리 위에 위치할 정도란다. 똥을 머리 위에 싼다니
진짜 머리 위에 똥 싸고 다니는 거나 다름이 없다니
좀 놀랍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서 아침저녁으로 아내와 내가 똥을 잘 치워주고 있다.
흙이 그리운 팽이
브로콜리 이파리를 몇 장 뜯어서 먹이로 줬던 날이었나. 브로콜리 잎 위에 똥도 아닌 것이 알처럼 가득 쌓여 있는 게 보였다. 난 그게 알인 줄 알고 달팽이 분양하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달팽이는 자웅동체라 한 마리만 키워도 자식 손자를 볼 수 있다. 그래서 새끼를 까겠구나 하며 신이 나 있었는데, 저녁에 보니 그냥 먹고 뱉은 것 같았다. 아쉬움에 달팽이 알에 대해 검색을 좀 해 봤는데, 사진들이 하나같이 흙에 알이 묻혀 있었다.
그래서 아내에게 말해서 바닥에 흙을 깔아주었다. 원래 흙에서 자라던 녀석인데, 흙을 못 보고 사니 얼마나 답답할까. 그러니 알도 못 낳고 저렇게 플라스틱 통 천장에만 붙어서 탈출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닐까.
흙을 깔아주니, 매우 빠른 속도로 먹고 있던 양배추를 내팽개치고 내려왔다. 그러더니 흙의 냄새를 맡고 뒹굴고 아주 웃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흙을 꼭 안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는데, 그 모습이 좀 뭉클하기도 하고 짠하기도 했다. 그때 그냥 다시 자연으로 보내줄까도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몇 시간이 지난 뒤 보니 흙에서 벗어나 여기저기 흙 똥을 싸놓고, 또 천장에 붙어 놀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흙을 껴안은 게 아니라, 그냥 흙도 먹고 있었던 거구만.
여전히 우리는 달팽이와 살고 있다.
우리집에 같이 사는 팽이
누구는 징그러워하고, 누구는 그냥 지나치고도 남을 달팽이.
더듬이를 건들면 쏘오옥 들어가는 모습으로 딸아이의 관심과 웃음을 차지한 녀석.
오늘도 자기 전에 인사를 해주고, 내일도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어디에 숨어 자는지 찾아보게 되는 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