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내가 뜨개를 하게 된 건 올 해가 난생 처음은 아니다.
20년 전, 나는 초등학생 때 3살 터울인 언니를 따라 대바늘 뜨개질을 했었던 기억이 있다. 여러 색이 염색된 실로 길게 겉뜨기, 안뜨기를 반복하며 목도리를 만들었던 언니를 따라 나도 목도리를 뜨겠다고 호기롭게 도전했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꼼꼼한 성격의 언니는 실수를 하면 푸르고 다시 뜨기를 반복해서 그랬던 것인지 코가 빠지거나 모양이 이상해진 부분이 없었다. 반면에 나는 속도를 내어 뜨개에 몰입하다가 편물을 펴보면 군데군데 코가 빠져있기도 했다. 여러번 풀러 다시 뜨기도 했지만 흐린눈을 하고 지나간 몇몇 코들은 완성된 목도리의 구멍이 되어 송송 뚫려있기도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나는 피아노학원을 다녔다. 아주 어릴 때 엄마가 피아노 학원을 끊어줬지만 3번 연습하고 10칸의 연습란을 모두 칠해버렸을 정도로 흥미가 없었고 이후에 내가 피아노를 다시 다니고 싶다고 해서 다니게 되었던 동네 음악학원이었다. 그 때를 생각해보면 왜인지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모습보다 책상에서 이론공부를 하며 뜨개질을 하고 있었던 모습이 떠오른다. 이전에 언니가 목도리를 떳던 염색실을 가지고 장갑을 만들고 있는 모습이다.
대바늘의 줄을 잘라서 바늘 3개를 이용해 원형뜨기를 했었는데 그건 피아노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것이었다. 선생님께 뜨개를 할 줄 아냐고 물어봤었다. 할 줄 안다고 하셔서 장갑 뜨는 것을 알려달라는 아이에게 선생님은 피아노 학원이었지만 뜨개를 가르쳐주시기도 하였다. 자녀가 대학교를 다니고 있었던 5-60대 여자 선생님이셨고 내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실 땐 가끔 내 손가락을 신경질적으로 누르실 때가 있었는데 뜨개를 가르쳐줄 때는 그렇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차가운 피아노 건반을 만지며 아이들을 상대하는 생활에서 보드라운 실과 바늘을 만지며 잠시나마 취미생활을 같이 즐길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대학원을 다니면서 문화예술교육수업을 들었고 거기에서 기억에 남는 예술교육 활동을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때 나는 뜨개를 가르쳐줬던 피아노 선생님 이야기를 발표했었고 그걸 발표하는 작년에만해도 그저 예술교육을 왜 해야 하는가, 예술교육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원론적인 주제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다. 그 배움을 받았던 아이의 관점에서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뜨개를 다시 하게 되면서 그것을 가르쳐줬던 선생님에 관점에서 그 작은 가르침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게 되기도 한다. 뜨개는 완성작을 만들며 성취감을 불러 일으키는 힐링이 되는 취미라고 한다. 그보다 더 깊이 들어가서 뜨개 하는 법을 배우고 알았던 것을 다시 상기시키며 실을 풀고, 실을 만지며 결을 느끼는 것, 한코씩 늘려 한단을 만들어내고 늘어나는 편물에 매번 뿌듯함과 기다림, 지루함 같은 과정의 감정을 느끼고 결국엔 나의 물건을 만드는 것. 그게 뜨개를 하는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 코바늘 작업들을 하다가 바늘이야기라는 뜨개 용품 전문점에서 파우치와 스트링백팩을 만든 것을 보게 되었다. 오랜만에 대바늘을 잡고 만들어보기 시작했다. 무늬가 없는 겉뜨기와 안뜨기를 반복하는 메리야스 뜨기로 완성하는 작품들이었는데 처음 잡는 코만 100코 이상에 길이는 40cm 이상을 떠야 하니 상당한 반복작업이었다. 어렸을 때는 할 일도 많고 놀아야 하니 뜨개를 할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아 몇시간씩 뜨개를 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일이 없는 대학원 졸업생은 무언가도 일처럼 해야 했던 탓일까. 뜨개를 앉은자리에서 8시간을 내리 겉뜨기 안뜨기만을 반복했다.
처음엔 폭삭 속았수다라는 드라마를 보며 뜨개를 하다가 4편을 보고나니 드라마에 집중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나는 뜨개를 멈추는 대신 드라마를 멈추고 뜨개를 이어 나갔다. 음악을 듣기도 하고 유튜브를 틀어놓기도 하면서 손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나는 뜨개 그로기 상태에 빠져들어갔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시야는 멍해지고 손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듯한 느낌.
'쉬어야겠다' 라고 생각하며 저녁을 먹었고 잠이 들기 전까지 다시 뜨개를 하였다. 그렇게 완성된 파우치와 스트링백팩. 완성작은 내가 기대 했던 것 보다 평범한 느낌이었다. 역시 뜨개의 목적은 완성품을 내는 것 그 자체 보다는 과정에 있음을 다시 한번 체감하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