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부수기 (3)
마스크 보다는 바나나.
입사하고 4달쯤 지났을 무렵 세상도 변하고 내 위치도 변해있었다. 판타지 소설 도입부 같은 문장이지만, 사실이다, 코로나가 퍼지고, 나는 건설현장에서 자재창고로 발령이 났다. 모든 것이 새롭다.
전 세계를 코로나가 완전히 덮기 시작하면서, 인도네시아도 1호 감염자, 1호 사망자가 나왔다. 본사에서 현장 방역 강화를 최우선으로 하란 지시가 내려졌다.
인도네시아에서도 마스크 대란이 일어나며 마스크 품귀현상이 심해졌다. 자카르타에 있는 본사 구매팀 직원들이 온종일 자카르타 시내를 돌아다니며 마스크를 힘들게 구매해서 현장에 보내줬다. 하지만, 자재창고 직원들은 아침 TBM(조회) 하면서 단체 사진을 찍을 때만 마스크를 쓰고, 일을 시작하면 덥다는 핑계로 마스크를 땅바닥에 버린다. 구하기 힘드니, 쓰기 싫으면 버리지 말고, 주머니에 넣어놓고라고 있으라 말했지만, 앞에서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본사의 지침을 따르기 위해 현장을 돌아다니며 직원들에게 마스크 좀 쓰고 일하라고, 달래도 보고 화를 내봐도 현장에선 여전히 덥다는 핑계로 내 말을 무시했다. 오히려 외지에서 출퇴근하는 나만 마스크를 쓰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내 탓을 하는 인원들도 있었다.
직원들의 텃세와 무시에도 혹여나 마음이 바뀌어 마스크를 쓴다고 할까 봐 사비를 들여 시장에서 웃돈을 얹어주고 마스크를 구해놨었다. 하지만 아무도 달라는 소리를 안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늘 하던 데로 아침 TBM을 진행할 때였다. 매일 했던 대로 제발 마스크를 쓰고 일하란 잔소리로 일장연설을 하는데, 현지인 중 직급이 제일 높은 직원이 내 말에 끼어들었다.
“미스터, 그만 좀 이야기해라, 듣기 지겹다. 우리는 건강한 사내들이라 마스크 따윈 필요가 없다! 차라리 그 돈으로 바나나를 사주면 먹고 건강해지겠다. 바나나에 비타민이 많이 들어있다! 똑똑한 사람이 그것도 모르냐?”
할 말을 잃었다. 이들은 안전의식도 없고, 위생관념도 없다. 심지어 내가 언어가 부족하니 나를 멍청이로 본다. 이런 이들을 이끌고 안전과 성과 두 마리의 토끼를 만들어 내야 한다. 이 정도면 판타지 소설에 속 주인공이 겪는 시련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