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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Jul 05. 2019

'죽이는 일'이 아니라 '살리는 일'

'살림'은 가장 거룩한 작업이다.

살림은 나에게 골칫거리였다.


가족들 안락함을 나를 내던지기 아까워한 셈이다. 나는 살림할 여자가 아닌데 하는 억울함 이 셔츠 다림질을 세탁소에 맡기면 그 시간에 책 한 장이라도 더 읽을 텐데 하면서.


식사 준비 는 더했다. 매 번 상을 차릴 때마다 내 안의 나와 싸웠다. '시켜먹을까? 아니면 도시락을 사다 먹을까? 반찬가게에서 사 올까?'


대안이 없던 시절에 비해 요즘은 경우의 수가 많아졌다. 대부분의 주부들이 저녁 시간만 되면 이런 고민을 할 .     

 

몇 년 전 수술을 다. 5일 있다가 집에 왔는데 집에는 밥을 해 먹은 흔적이 없었다. 남편은 나와 함께 병원에 있었고 친정아버지가 대신 집에 와 계셨는데 주로 시켜먹거나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던 것이다. 냉장고는 텅 비어 있고 집안 전체에 냉기가 퍼져있었다.


수술 후유증으로 움직이기가 힘들었던 나는 그 냉기를 한 동안 더 이어갔다. 기력이 없는 몸으로는 살림을 할 수가 없었다.


당시 아이들도 어려서 살림을 도울 상황이 아니었다. 남편은 최선을 다했지만 남자로서의 한계를 충실히 드러냈다.


결국 집안 살림엉망 되었다. 그때 방안에 누워있던 내게 소박한 바람이 생겼다. 


그것은 빨리 기운 내서 여행을 가고 싶다. 누굴 만나고 싶다. 가 아니었다.  

    

바로 집안 살림을 고 싶다는 것이었다.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해보기도 했다.


마치 영화 '올드 보이'에서 주인공이 방 안에 갇혀있을 때 나가게 되면 어떻게 싸울지 연습했듯이 말이다.    

  

기운을 차리고 나면 집안을 반짝거리게 만들고 싶었다.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치 내가 야멸차게 차 버린 남자 친구가 연예인이 되어서 텔레비전에 나온 듯한 느낌. 


'내가 몰라보다니. 그렇게 가치가 있는 거였는데.'


그동안 살림을 소홀히 한 건 실력이 기 때문이다. 살림의 중요성을 무시한 도 있다. 하지만 살림은 너무도 위대한 일이었다.     

 

살림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가족들이 안정을 취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엉켰다.


밥다운 밥을 못 얻어먹으니 다들 속이 헛헛한지 이것저것 군것질만 해대고.


남매는 줄곧 싸우기만 했다.


남편은 남편대로 아침마다 속옷이며 양말이며 찾아대기 바빴다.


그런 집집이라고 없었다. 지붕만 얹은 노숙자들의 휴식 터지.   

   

어느 정도 몸을 추스르고 나자 '살림'이란 걸 하기 시작했다. 집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다.


한 마디로 '죽임'이 아닌 '살림' 시작되었다.


''  이렇게 할 것이다.


"주인님이 드디어 일어났다. 그리고 죽어가는 나에게 산소 호흡기를 대주었다. 간신히 숨이 꼴깍거리는 내게. 그리고 다시 살려내기 시작했다. 나는 소생할 것이다. '죽임'에서 '살림'으로 제 역할을 하고 있는 주인님 만세!"


그렇다. 나는 내가 매일 하고 있던 '살리는 일'을 소홀히 여겼다.


그 일은 집을 살리고 가족들을 살리고 나를 살리는 일이었다. 가족들을 이어주는 대동맥 같은 일이었고 그 안에 피를 돌게 하는 일이었다.


그 뒤로 살림 자체를 탓하지는 않게 되었다. 다만 나 혼자 말고 다 같이 협력해서 살리자고 읍소할 .


효과는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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