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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Jul 05. 2019

꼭 배 아파서 낳아야만  내 아이인가요?

모성애의 진정한 의미

전원일기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시골을 무대로 휴머니즘을 다루었다. 그 드라마에서 한 장면이 아직도 감동으로 남는다. 김혜자 씨가 나오는 장면이다.


아이가 메이커 운동화를 신고 싶어 하는데도 남편이 사치라면서 안 사준다. 그러자 옆집에 가서 남편 흉을 보면서 하는 말이,

"내 배 아파서 낳았으면 이렇게 가슴 아프지 않아요."


어린 마음에도 그 대사가 선명히 기억에 남았다. 그 아이는 남편이 데려와서 키우는 아이다.

이상했다.

'내 배 아파서 낳아야 가슴이 더 아픈 거 아닌가?' 하면서.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드는 생각은 그것이다. 그 대사에는 함축된 뜻이 있다고.


내가 직접 낳은 아이는 핏줄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아이가 서운한 마음이 들어도 금방 치유가 된다.


하지만 남의 집에 들어와 사는 그 아이 입장에서는 서운한 마음이 배가 될 것이다. 자기가 친자식이 아니라서 안 사주나 보다 하고. 그런 마음까지 헤아려 가슴 아파하는 마음이 드러난 것이다.


이혼이 늘어나면서 재혼가정이 많아지고 있다. 남녀가 서로 안 맞아서 이혼하고 재혼하는 게 별 건가? 남끼리 살다 보면 싸우고 헤어질 수도 있지. 하면서 이혼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너그러워졌다.


하지만 전처나 전남편의 아이를 양육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얼마 전 30여 년 만에 고등학교 동창생을 만났다. 그 동창생은 학원 운영으로 꽤 성공한 편이다. 학원생도 많을 뿐만 아니라 지역에서 존경받고 있다. 각종 선행사업을 하기 때문이다.  한부모 가정의 아이들에게는 수업료를 면제해준다. 여러 가지로 존경스러운 면이 많았다.


진짜 존경스러운 부분은 따로 있었다. 친구의 현재 남편은 재혼으로 만났다. 각자 첫 번째 결혼에서 낳은 아이가 하나씩 있었다. 그리고 또 새로 낳은 아이, 이렇게 세 아이와 함께 살게 되었다. 이 친구는 남편이 데려온 아들을 다섯 살 때부터 키웠다.


그런데 친구는 이 아이에 대해 특별히 사랑을 느낀다고 했다. 친구는 이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친엄마를 찾으라고 했다.


그러자 이 아들이 하는 말이 자긴 친구를 친엄마로 생각한다고. 자기를 평생 찾지도 않는 엄마를 찾아가는 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친구는 뿌듯해하면서 엄살을 떤다.

"스물여덟 살이나 먹은 애가 아직도 나만 찾아. 매일 전화하고 말이야. 사소한 것까지 나랑 의논해. 바빠 죽겠는데."


얼마 전에는 둘이서 여행까지 다녀왔단다. 배 아파서 낳은 아이들보다 그 아들이 좋단다.


너무 감동했다.

"이런 사람이 바로 내 친구예요." 하면서 이렇게 막 자랑하고 싶어 진다.


일로 만나게 된 지인이 있다. 40대 여자분인데 어릴 적 아빠가 이혼하고 새엄마랑 재혼했다고 한다.


그 엄마가 동생 둘을 더 낳았는데 자길 유난히 사랑하며 키웠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혼한 후에는 자기가 모시고 산다. 엄마가 동생들보다 자기가 더 편하다면서 같이 살고 싶어 했단다. 자기도 엄마가 너무 재미있고 편해서 좋단다.


유난히 자기 핏줄을 따지는 우리 문화에서 듣기만 해도 흐뭇한 미담이다.


자기 아이만 예뻐하는 엄마들의 심리는 어떨까? 지극한 모성애 때문일까? 아니라고 본다. 그런 엄마들의 경우 시부모님이나 남편보다 아이들을 더 챙긴다.


아이에 대한 사랑이라기보다 '자기애'가 아이에게 투사된 것으로 보인다.


자기 아이만 챙기는 사람들을 보면 이기적이다. 자기 아이가 무시라도 당하면 참을 수 없어하고 돋보이길 바란다.


학교에서 힘든 경우 학부모 때문인 경우가 많다. 학부모가 자기 아이만 생각하는 경우 대화 자체가 진행이 안 된다.


예를 들어,

"선생님. 우리 아이가 냄새에 너무 예민해서 그러는데요. 짝이 잘 안 씻나 봐요. 그 애가 엄마가 없는 아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애가 워낙 지저분하고. 죄송한데 짝 좀 바꿔주세요."


그러면 나는 절대 지지 않고 말한다.

"어머님. 그러면 그 아인 누가 짝이 되어야 하죠?"


그리고 짝인 아이 집에 전화를 걸어 아이 청결에 대해 부탁을 한다.


냄새에 민감한 그 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앞으로 훨씬 더 지독한 냄새로 가득하다. 고작 짝에게서 나는 냄새 하나도 못 참아하면 어떻게 거친 이 세상을 살아나갈까?


게다가 그런 아이의 불평을 전화로까지 해서 이야기하는 엄마의 속마음은 무얼까? 우리 아이는 절대로 힘든 일을 겪으면 안 된다는 걸까? 짝이 상처를 받던 말던?


우리 조상들은 분명 다른 아이도 함께 내 아이처럼 키웠을 텐데 말이다. 동굴 생활 당시 남자들은 밖에 나가서 사냥을 하고 여자들은 동굴 안에서 아이들을 키웠다. (그 흔적으로 남자들은 카페 가면 문을 바라보고 앉고 여자들은 문을 등지고 앉는단다. 남자들은 날짐승들이 동굴 안에 들어올까 보초를 서는 습성이 있어서란다.)


남자가 사냥 중 사망하면 그 아이는 여자들이 공동으로 키웠을 것이다. 당연히 모계사회였다.


어릴 적 시골 풍경도 비슷했다. 부모가 없는 집 아이들은 동네 사람들이 먹을 것 등을 챙겨주며 거두었다.


심청전에 보면 심봉사가 동냥젖을 얻어 심청이를 키운 이야기가 나온다. 남의 아기에게 젖까지 물릴 수 있는 것이 진정한 모성애가 아닐까?


모성애가 단지 자기 아이만 잘 키우는 것에 해당하진 않을 것이다.


오래전 김혜자 씨 아들과 어릴 적 친구였던 사람과 대화를 한 적이 있다.


그분은 김혜자 씨가 방송에 나오는 걸 보더니 하는 말이

"김혜자 씨가 나오네."

하는 것이다.


연예인에게 씨-자를 붙이는 게 어색하게 느껴져서 말을 하자,


"그럴 수밖에 없지요. 내 친구 엄마였으니까요. 그리고 나를 유난히 챙겨주셨거든요. 하루는 개구리를 잡아다 노는 걸 보시더니 엄청 크게 혼을 내셨어요. 개구리에게도 엄마가 있는데 얼마나 찾겠냐고요. 그리고 우리에게 카레밥을 맛있게 해 주셨어요. 그 뒤로도 저를 안 쓰러워하시면서 밥을 잘 챙겨주셨거든요."


그분은 그 당시 아빠가 이혼을 해서 엄마가 없었다. 그걸 아신 것 같다는 것이다. 그 당시 김혜자 씨가 방송에 한창 많이 나오시던 때라 스타가 그런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것이 놀라웠다.


그 이야기를 듣자 전원일기에서의 엄마 역할이 더 이상 연기가 아닌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 아들은 도시락 사업을 하고 '혜자스럽다'라는 형용사까지 탄생시켰다.


김혜자 씨를 보면서 모성애란 보편적으로 적용되었을 때 진정성이 있다는 걸 느낀다.


자기 아이만 아는 것은 '자기애'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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