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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Jul 16. 2019

이름이 의미하는 것

딸 부잣집에 있던 그 많던 후남이 들.

중학교 한 시간이었나 보다. 자기 이름 한자 뜻 말하기였는데, 내 이름을 말하려니 부아가 났다.  '별 뜻'이 없어서다.

 딸만 내리 다섯인 집에서 딸 낳았다고 잔치하는 것 까지 바라진 않는다. 다만 이름이라도 신중하게 지었다면.


내 이름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뜻이 있다면 맑을'숙'자 하나인데, 이 또한 험난한 세상에 맑기만 해서 대체 어디에다 쓸까 싶다.

 

가운데 들어가는 '윤'자도 윤택할 '윤'자였다면 아마도 지금보다는 더 윤택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내가 빛날 '윤'이나 윤택할 '윤'자를 안 쓰고  왜 윤달'윤'자를 썼냐고 아빠한테 물어본 적이 있다. 그때 아빠가 대답하시기를,

"출생 신고하러 갔는데 무슨 한자 쓸 거냐고 직원이 물어봐서 아무거나 쓰라고 했지."


기가 막히다. 좋은 뜻을 가진 다른 한자 놔두고 하필 아무 뜻도 없는 윤달 '윤'자를 쓰다니. 윤달에 태어난 것도 아닌데.


중학교 친구는 나보다 더 하다. 할아버지가 출생신고를 하러 가셨다. 친구 이름 끝에 '숙'자가 들어가는데 이빨이 없으셔서 발음이 샜단다. 그래서 '식'으로 발음하신 거다. 그 발음을 그대로 받아 적은 직원.  물론 한자도 셀프 작업했을 테고.


아들들은 다르다. 대부분 집안 대대로 돌림자가 있다. 그 돌림자에 획수나 부수 같은 걸 대입한다. 상대적으로 고민을 덜하니 몇 가지 중에서 신중하게 고른다.


이름만 그런 건 아니다. 딸 가진 집에서는 못난이라는 별명을 많이 불렀다. 나는 어릴 때  못생겼다고 못난이라고 불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팩트 폭력을 다른 누구도 아닌 부모가 했다는 게 참.


내가 그 말을 하니 우리 학교 여선생님이 하는 말이,

"못난이라는 말을 진짜 못생긴 여자애들한테는 안 썼대요. 너무 예쁘니 누가 데려갈까 봐 일부러 못난이라고 그랬다던데요?"


그러면서 자기도 못난이 소릴 들었단다. 부모님이  되도록 좋게 포장해서 말씀해 주신듯.


나는 내 이름이 싫다. 끝에 '숙'자가 들어간 것이 일본식을 따랐다는 것도 그렇고, 별 볼일 없는 듯 여성스러운 느낌이 싫다. 그래서 내 이름을 윤색하곤 한다.


작년에는 5, 6학년 도덕 전담을 맡았다. 첫 수업시간이었다. 칠판에 삼행시를 써서 내 이름을 소개했다.


'허허로운 세상을

 윤기 나게 해 줄

 숙성된 사람이 되자!'


말하고 보니 사뭇 비장하기까지 하다.


아이들에게도 자기 이름으로 행시를 지으라고 했다. 그 안에 자기가 원하는 의미를 넣어서.


이름에는  그 당시 사회분위기가 반영된다. 유명한 정치가 이름을 자식한테 짓는 경우가 많은데 위험한 발상이다. 나중에 그 정치가가 나쁜 독재자란 게 밝혀지면 얼마나 황당한가?


과거엔 아들 선호 사상이 심했다. 우리 집을 보면 알 수 있다. 딸만 다섯. 그 숫자가 의미하는 건 바로,

 "아들 낳고 싶어서 계속 낳았죠. 누가 다섯이나 낳고 싶었겠어요? 살기 힘든데? 그런데 결국 아들 낳는 데는 실패한 셈이죠."

라는 무언의 비극이 담겨있다.


내 친구네는 한술 더 떠서 딸만 여덟이었다. 그리고 그런 집 딸 중 한 명은 후남이라는 이름이 있다. 문제는 후덕할 '후'자를 쓰는 게 아니라 뒤'후'자를 쓰고 남자'남'자를 쓴다는 사실이다. 뒤에 남동생이 태어나도록 말이다. 사람이 무슨 펌프 마중물도 아니고.


실제로 예전에 '아들과 딸'이라는 드라마에서 김희애 극 중 배역 이름이 후남이었다.

 

나는 어린 마음에도 그 남녀차별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다른 집엔 아들이 있는데 우리 집엔 딸만 있으니 세력이 약해 보였다. 실제로 집안 대소사에 있어 발언권이 제일 약했다.


이름에는 그 사람의 정체성이  담겨있다. 예를 들어 우리 시대엔 딸의 경우 계집'희'자를 많이 썼다. 거기에 무슨 희망이 담겼는지는 모르겠다.


자기 이름은 자기가 가장 많이 쓰니, 이름은 자기가 지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혼란이 야기될 수 있으니 예명이나 적어도 글자를 가지고 행시라도 짓는 것이다. 자기 이름이 마음에 든다면 상관없지만.


몇 년 전 3학년 담임을 했을 때 그 방법을 쓴 적이 있다. 즉 여름방학식날 반 아이들에게 이름 하나하나 행시를 지어서 예쁜 편지지에 써서 봉투에 담아주었다. 그때 학부모들이 더 감격했다. 자기 아이에게 이렇게 신경을 써 주어서 말이다.


그 반 아이들은 거칠고 산만했었다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한 아이들이 많아서다. 하지만 교사의 편지까지 받으니 학부모들이 자녀에게 조금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삼행시에 그 아이의 장점과 내가 바라는 희망을 넣어서 지었다. 꼬박 이틀이 걸렸지만 아이들이 편지봉투를 받아 들고 좋아해서 나도 기뻤다.


자기 정체성, 자존감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없다.


무조건 자기 혼자 해내야 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그 작업이 쉽지가 않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내가 나를 남보다 더 좋아한다고 해서 서운해할 사람도 없는데 말이다.


그게 가장 어렵다. 나를 자랑스러워하거나 사랑스러워하기가.


나도 꽤 오래 결렸다. 지금 그 과정을 돌이켜보면 가장 먼저 장애물 제거 작업부터 해야 했다. 딸이라고 무시당했던 설움. 다른 형제보다 아니면, 이웃 아이보다 공부 못한다고 당했던 무시, 잘난 친구들에 비해 처져서 느꼈던 소외감. 직장에서 실수했다고 받았던 구박.


그리고 그 가운데에 늘 따라다녔던 '이름'이라는 존재. 누구보다 내가 가장 많이 들었을 내 이름.


그 이름이 내 정체성을 담고 있다면 그 의미는 내가 규정해야 하지 않을까?


즉 말하자면,

나는 세상이 조금 더 윤기 났으면 좋겠고, 거기에 도움을 주는 성숙한 인간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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