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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Jul 18. 2019

자기가 겪은 고통을 건설적으로 치환하려면

꼰대가 되지 않는 가장 쉬운 방법

"내가 얼마나 답답했었는지 알아?"

"뭐가?"

"그때 내가 다리가 저다는 말을 어떻게 알아? 제일 비슷한 말 중 가렵다고 했는데 엄마가 그것도 모르고 계속 내 다릴 벅벅 긁으니까. 그래서 결심했지. 내가 어른이 되면 저러지 말아야지 하고 말이야. 난 아기들 말을 제대로 이해해야겠다고."


이제야 이해가 된다. 우리 딸이 서너 살 무렵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소릴 꽥 지르면서 "엄마 다리가 가려워." 그러는 거다. 나는 허둥지둥 다릴 긁어주었다. 그러면 더 소릴 지르면서 "아니 그게 아니고 다리 속이 가렵다고."


그러면 나는 보이지도 않는 다리 속을 뚫어져라 보며 더 세게, 양손을 이용해서 긁어주었다.  그러면 발을 동동 구르면서 더 난리를 쳤다.


다른 애기 엄마들이 와 있을 때 그러면 진짜 곤란해졌다. 너무 소릴 지르니 무안해서,


"얘가 가끔 다리가 가렵다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아토피는 아닌데."

그러면 엄마들이 별스런 아이 다 보네 하듯이 혀를 찼다.

 

지금 생각하면 참 미안하다. 아기가 다리가 저린다는 '난이도 상'인 말을 어떻게 알겠는가? 고작 가렵다, 아프다 정도지. 딸은 저린다는 말을 모르고 엄마는 그 속을 모르니, 다리가 저릴 때마다 그런 장면이 반복되었다.



우리 딸은 나랑 떨어져 있는 시간에 늘 불안했다고 한다. 엄마가 자길 버릴까 봐. 이해가 안 갔다. 나는 우리 딸에게 충분히 애정을 주면서 길렀다. 주변 엄마들은 내가 우리 딸에게 하는 걸 보면 자기들이 계모처럼 느껴진다고 하기도. 하지만 덜렁대는 게 문제다. 아기가 보기에도 엄마 하는 행동이 영 믿음이 안 간 게다. 엄마가 혹시 자기 존재마저 까먹고 어디 두고 와서 잃어버릴까 봐.


쓸데없는 오해많았다.


우리 딸은 이가 빨리 상했다. 이미 세 살 무렵 이가 썩어서 치료할 게 많았다. 하루는 아동 전문 치과에 갔다. 그곳은 일반 치과와 달리 알록달록하게 인테리어 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일반 치과에 없는 장치가 있었다. 몸 전체를 묶는 밴드다. 그 밴드로 몸을 묶어 놓으면 아이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치료를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다.


병원에서는 치료하기 전에 아이에게 수면 시럽을 먹였다. 그 후 잠이 들어야 하는데, 우리 딸은 끝까지 잠이 들지 않고 치과치료 끝날 때까지도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치료가 끝나자 의사가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이렇게 고집 센 아이는 처음 봤다고. 나는 그 잠이 안 든 것과 고집 센 것과 무슨 상관이람?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 딸이 그때 상황을 말해주었다. 자긴 평소에도 엄마가 언제 자길 버릴지 몰라서 걱정을 했는데, 치과에서는 '바로 이날이구나.' 하고 직감을 했단다. 이제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하고 자긴 절대 버려지지 않을 거라고 굳은 결심을 했단다. 그래서 약을 먹고 졸린데도 꿋꿋하게 버텼다고.


그런데 병원에서 자길 의자에 눕히고는 곧바로 묶어버렸단다. 그래서 자길 구해달라고 엄마한테 소리치는데 엄마는 심지어 해맑게 웃으면서 자기에게 영원한 이별의 의미로 손을 흔드는 것이 아닌가? 그 미소가 더 무서웠단다. 자길 버리면서 그토록 홀가분한 표정을 지으니까.


어린아이 입장에서 생각하니 미안하긴 한다. 우리 딸은 그 당시 어쩜 그렇게도 나랑 엇갈린 생각을 하고 살았던 것일까?

 

나는 그때 비싼 아동 전문 치과에서 치료해주는 내가 뿌듯했다. 동시에 카드 한도 걱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테리어도 예쁘고 의사, 간호사도 친절하길래 아이를 산뜻하게 묶고 인사까지 했는데 그게 마녀처럼 보였을 생각을 하니.


조금 더 아이 입장에서 생각을 했어야 했다. 치과에 가기 전 충분히 설명을 해주며 너를 꼭 찾으러 갈 거다 하고.


이론적으로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아기들이 밤에 안 자고 칭얼대는 이유는 잠이 들면 엄마와 영영 이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란다. 우리 딸 이야길 들어보면 맞는 것 같다. 자긴 밤에 잠이 드는 게 그렇게 무서단다. 모든 게 끝나는 거 같아서. 그런데 아기가 밤에 잠을 안 자면 엄마들은 아기가 자길 괴롭힌다고 생각해서 짜증을 내기도 한다. 고집이 센 아이라거나 성격이 까다롭다고 생각하기도.


딸과 이런 해묵은 이야길 하다 보니 사람이 얼마나 자기의 생각을 배신하는지에 대해  깨닫는다. 나도 딸과 같은 입장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분명 엄마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세 살 이 전 같은 데 무슨 일이었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어쨌든 나는 아기 신분으로서 몹시 불편하고 자존심이 상해 있었다. 아마 사람들 보는 앞에서 기저귀를 갈았거나 했던 것 같다. 창피하게.


하지만 말이 안 나왔다. 머릿속 하나 가득 말이 있는데,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고는 겨우 의미 없는 단음절 정도. 그 억울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때 결심을 했다. 내가 크면 아기들의 이 억울함을 대표해서 사전을 만들겠노라고. 아기들이 불편해하는 일들을 위주로 사전을 만드는 거다. 그래서 엄마들이 아기들의 눈빛이나 말 한마디만 가지고도 알아챌 수 있는 '아주 아주 화목한 가정'을 만드는 게 내 꿈이었다.  


그러나 그 기억은 어느새 기억 저편으로 희미하게 사라져 버렸다. 그런 기억을 가두기엔 내 생활이 바빴다고 해야겠다. 학교 적응하랴. 친구 사귀랴. 형제들과 먹을 것 경쟁하랴. 그러다가 문득 딸이 그 이야길 하니 떠오른 것이다. 너무 늦게.


이런저런 이유로 우린 남의 어려움을 공감하는 것이 힘들어지는 게 아닐까? 이제야 꼰대가 되는 과정이 참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 게 보인다. 즉 시간이 지나가면서 또 바빠서 내가 느꼈던 불쾌함을 건설적인 것으로 맞바꾸지 못한 것이다.


예전 매운 시집살이를 당한 며느리가 나중에 자긴 며느리에게 잘해줄 거라고 하다가 더 심한 시집살이를 한다는 말이 있다. 그 경우도 분명 자기의 고통을 건설적으로 맞바꾸지 못한 때문이다.


예전 사법고시가 있을 때 이야기다. 사법고시 패스한 사람 중에는 개천에서 용 난 사람이 많았다. 용에도 두 가지 타입이 있는데,


'나도 했는데 너는 왜 못 해?' 형과 '진짜 힘들었겠다. 나도 힘들어 봐서 알거든.'형이다.


예를 들어 가난하게 자라서 도둑이 된 사람이 있다고 치자. 이때 동정이 일어나 형을 감해 주는 판사와 더 혹독하게 단죄하는 형이다. 무엇이 옳은지는 모르겠지만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의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사람마다 자신의 고통을 처리하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1. 자기가 겪은 고통을 너도 겪어봐라 하는 형과

2. 사느라고 바빠서 그런 거 따윈 기억도 안 하는 형과

3. 내가 겪은 고통을 최소한 남들은 겪지 않게 하자는 형


위 셋 중에서 어느 인생을 살아가느냐에 따라 자기가 하는 일의 질이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교육이나 정치, 경제, 외교 문제 등 무엇 하나 만만치 않은 현재 우리나라.

건전하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해결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어쨌거나 태어난 김에 어떤 방식으로든 살긴 해야 하잖은가?

이왕 살기로 한 거 쫌 멋지게 살다가려면, 그래서 웬만하면 나이 들어서 꼰대 소리 안 들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에 감단언해본다. 보통 수준의 공감능력과 최소한의 기억력, 그리고 약간의 선한 의도가 필요할 뿐이라고.


사실 내 기억을 더듬어 조금 더 덧붙이자면, 예전 가난했지만 공동체를 중시하던 시절의 따뜻함이다.


따뜻함이 몹시도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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