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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Jul 19. 2019

음식으로 향수병을  치료한다고요?

상해에 살 때 한국 음식이 너무 그리워 눈물이 났다.

"많이 주세요."

급식해주시는 아주머니에게 내가 매일 하는 말이었다. 그러면 곁에 있는 선생님이 흘끗 쳐다본다. 참 입맛이 저렴한가 보다. 이게 뭐가 맛있다고. 하는 표정으로.


2005년도에 사업을 하기 위해 상해로 갔다가 2009년도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학교 교사로 근무를 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학교로 오니 모든 게 낯설었지만 좋은 것도 있었다. 학교 급식이다. 내가 젊었을 땐 학교 급식이란 게 없었다.


난생처음 먹어본 학교 급식이 너무 맛이 있는 거다. (알고 보니 그 학교 급식은 맛이 없기로 유명했다.)


급식이 아니어도 한국에 오니 모든 게 맛이 있었다. 하얀 밥에 간장만 넣고 비벼먹어도 꿀맛이었다. 이 모든 게 한국산이라니, 한국산이라니 하면서. 상해에서 한국산은 값비싼 수입품인데 하면서 말이다.


우유는 떻고. 학생들은 우유를 먹기 싫어해서 교실마다 우유가 남아돌았다. 상해에선 손을 떨면서 한 병에 만원 하는 한국 우유를 몇 번 사 먹어봤다. 매일 비행기 특송으로 오는 우유였다.


처음 해 본 해외살이는 여러모로 힘들었다. 급기야 상해에 간지 몇 달 심한 향수병에 걸렸다. 원인 모를 두통과 불면증, 초조함 증세가 이어졌다. 이유 없이 눈물이 흐르기도 했다.


나는 한국을 몹시 그리워하고 있었다.


하루는 위성 안테나를 설치하여 한국 드라마를 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나는 텔레비전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유형의 사람이다.)


심지어 일일 막장 드라마인데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욕을 해도 시원찮을 된장녀 역할의 여배우를, 입을 헤 벌리고 보았다. 화장법, 옷차림, 말투 등이 너무 아름다워서.


주변에서 한국말을 들을 일이 별로 없었다. 조선족 가사도우미와 우리 회사 직원이 있었지만 한국말이라고 하기엔 억양이나 단어가 중국말 그 자체였기 때문.


게다가 남편은 당시 한국 사무실 운영 때문에 주로 국에 있었다. 나 홀로 외로운 사투를 벌여야 했다.


텔레비전 리모컨을 아이들이 가지고 놀다가 잃어버리면 아이들을 호되게 잡았다. 그리고 미친 여자처럼 머리를 풀어헤치고 여기저기 리모컨을 찾아 헤맸다. 리모컨은 나와 한국을 이어주는 생명줄이었다.


러다가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내가 무엇보다도 한국음식을 그리워했다는 것을.

 

하루는 한국인 집에 놀러 갔다. 딸아이와 같은 유치원 학부모로 알게 된 사이인데, 그 엄마가 마침 한국에 다녀온 직후였다. 그 엄마는 친정엄마가 싸주신 김치와 된장을 이용해서 저녁 밥상을 차려주었다.

 

나는 평소 한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서구식을 좋아한 편이었고 중국 음식이 더 입에 맞았다. 그런데 그 엄마가 차려준 된장찌개 백반을 허겁지겁 먹는 나를 깨닫게 된 것이다. 체면이고 뭐고 없었다.


감사인사를 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신기한 일이 생겼다. 그렇게 심하던 두통이 사라진 것이다. 그날 밤 오랜만에 중간에 깨지 않고 숙면을 취했다.


당시 우리 집에 상주하시던 가사도우미 아줌마도 요릴 잘하셨다. 매일 아침저녁 한국식 밥상으로 정성껏 차려주셨다.


그런데 달랐다. 한국에서 온 재료, 그리고 한국인의 손으로 한 음식과.


아주머니가 시장에서 사 온 떡으로 끓인 떡국은 떡국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떡은 어슷 썰어야 한다. 그런데 그 떡국 떡은 정확원형이었다. 처음엔 모양이 어슷하건 동그랗건 무슨 상관일까 싶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내 입에 들어가서 내 미뢰에 닿는 순간 뇌로 강하게 전달되는 파장이 없었다. 영양학적으로만 같을 뿐.


생선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시장에서 사 온 갈치는 분명 제주 은갈치 못지않게 은빛으로 빛이 나고 살이 두툼했다. 하지만 달랐다. 감칠맛이 없었고 살이 물컹했다.


혀가 민감했던 우리 아들은 매일 음식 타박을 했다.

"엄마. 이 갈치에서 재미가 없는 맛이 요."

이는 다섯 살짜리가 할 수 있는 최대 한도의 표현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음식 맛들이 참 재미가 없었다.


가장 괴로운 건 과일이었다. 처음엔 우리나라에 없는 열대과일이 많아 신기했다. 하지만 처음 맛보는 과일들은 금세 싫증이 났다. 그래서 한국 과일을 사보았는데 우리나라 과일과 한참 달랐다.


백설공주가 한 입 베어 먹고 죽은 사과같이 검붉게 생긴 사과는 보기와 다르게 싱거운  같았고, 흐리멍덩한 색의 사과는 달긴 단데 재미없게 달았다. 무엇보다 푸석한 질감을 참을 수가 없었다.


과일 한 입 깨물었을 때 입 안 가득 터지는 과즙과, 서걱서걱 소릴 귀로 듣는 청량한 식감을 빼고 과일을 먹을 이유가 있을까? 그건 과일의 존재 이유인데.


어떤 과일도 과일의 3대 의무인 당도와 식감, 색깔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우리나라 음식 재료와 분명 다 같았다. 그런데 하나도 같지 않은, 이상한 일이었다. 재료 하나하나로 볼 때는 미세한 차이였다. 맛도 비슷했다.


문제는 요리를 하면 작은 차이의 합이 어마어마한 차이를 드러낸다는 사실이다. 석회질이 많은 물 때문이기도 했다. 투명 유리잔을 깨끗이 씻어 놓아도 물기가 마르면 뿌옇게 변했다.


음식 재료와 물의 차이로 결국 재미없는 맛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상해에 살면서 처음엔 현지인과 똑같이 생활해보려고 했다. 그렇게 하면 생활비가 적게 든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결국 간장 하나, 물 하나까지 한국산을 찾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생활비가 많이 들어갔다.


다른 건 그래도 중국산으로 어떻게 해보겠는데 말이다.


한편으론 고작 입으로 들어갔다가 밖으로 나가는 음식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 싶었다.


하지만 음식은 단순히 소화기관을 거쳐 밖으로 배설되는 일회성 물질이 아니었다.


보고 냄새를 고 먹는 행위 내내 음식은 내 영혼과 교감하고 있었다.


마치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통째로 압축파일로 만들어 미뢰 밑에 감추어 놓은 것 같았다.

그 압축파일은 수시로 압축을 해제하여 음식을 평가하는 바로미터로 쓰이곤 한다.


"이 김치는 음.. 중국산 배추네. 역시 단맛이 덜해. 또 이건 뭐야? 고춧가루를 태양초로 썼어야지. 그럼 내가 모를 줄 알고? 이건 그냥 기계에서 말린 거잖아. 그러면 고추 단맛이 다 빠져버린다고. 햇빛이 뭐 거저인 줄 알아? 그리고 또.. 음... 이거 물맛이 뭐 이래? 정수기 물 쓰지 말랬잖아. 미네랄이 하나도 없구먼. 지하 200미터 암반수에서 흐르는 물. 그게 제일 맛있어. 미네랄이 풍부하거든. 다음번엔 꼭. 꼭."


이런 시어머님 잔소리 같은 꼬장꼬장함에 질릴 때도 있다. 주변에서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을 보면 한 대 때려주고 싶을 때도 있다. 안 굶는 게 어딘데. 하면서.


한편으론 영혼을 치료하는 게 약이 아니라 음식인 게 다행란 생각이 든다. 몸이 알아서 자기에게 좋은 걸 먹는다는데 할 말이 없다.


나는 상해에 간 후로 향수병이 걸리자 주로 음식으로 치유했다. 남편이 한국에서 상해로 올 때마다 웬만한 식재료들을 사 가지고 오게 한 것이다.


된장이나 고추장, 김치 시어머님이 싸주다. 그 식재료로 요리를 하고 내 미뢰 밑에 있는 압축파일을 열어, 그 맛을 천천히 음미하는 것이다.


그러면 기절 직전이던 뇌와 간과 위의 세포들이 하나 둘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음식을 다 먹을 때쯤이면, 한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자기들이 조금은 더 참아줄 수 있다고 거드름을 피웠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 살고 있는 지금,

상해에 살 때에 비해 엄청나게 불어난 체중으로 고통받고 있다. 이제 덜먹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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