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빚진' 짓이다
결혼이라는 대형 구매 사건 후, 우리는 평생에 걸쳐 그 할부금을 갚는다.
얼마 전 유명 연예인 부부 이혼이 큰 이슈였다. 둘 다 멋있고 예뻐서 대한민국 수많은 남녀 가슴에 대못을 박고 결혼하더니 결국 헤어졌다.
기사를 보고 유추해보니, 둘이 같이 산 기간이 얼마 안 된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는 영화가 있었지만 내가 보기에 결혼은 '빚진 짓'이다.
미래에 어떤 꽃을 피울지 알 수 없는 사람과 평생 함께 살자는 것은, 마치 신용카드로 고가의 물건을 덜컥 사버리는 것과 같다.
이 결정에는 '협조자'들이 있다.(공범자들인가?)
고작 2, 3년 동안 뇌에서 분비되는 '화학 호르몬'과 특정 식물 포장지(콩깍지)다. 즉 눈과 호르몬이 빚을 지고 우린 일생을 다 바쳐 빚잔치를 한다.
문제는 구매 결정을 후회할 수가 있다는 것.
결혼시기가 늦어지고 있지만 보통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에 한다. 인격이 완성되기엔 이른 시기다.
인생을 '기승전결'로 봤을 때 '기' 후반이라고 할 수 있다.
'승'을 배우자와 같이 보내게 되는데, 이때까지도 성격이나 가치관이 둘 다 어설프다.
이 어설픔에 실망해서 조기에 반품하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이 경우 그 뒤로 일어날 화려한 '승'과 안정적인 '전', 모든 윤곽이 드러나는 '결'을 볼 수 없다.
그 결과, '알고 보니 참 괜찮은 남자였네.' 하고 후회하면서 무릎을 칠 수도.(다양한 컨디션에도 내가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이유다. 나중에 무릎을 치면서 억울해할까 봐.)
나는 모의'무릎치기'를 이미 경험해 봤다. 결혼 전 한 남자가 따라다녔다. 원래 놓친 물고기가 커 보이는 법. 하지만 커도 너무 큰 거다.(수백억 성공신화의 주인공이 되어 방송에 나오더라는.)
그냥 쿨하게 "까짓 거 돈이 뭐가 그리 중헌디." 하고 만다. 여기까진 괜찮다.
그는 나랑 만나도 말이 없어서 답답했다. 전화를 걸어서도 말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려면 왜 전화를 했는지.
그런데 방송에선 인터뷰를 너무 잘하는 것이다. 하는 일이 말을 잘해야 하는 분야이기도 하고. 그는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위축되는 스타일이었을 수도 있다. 우리 남편은 그 당시 위축은커녕 내 앞에서 너무나도 당당했다. 가히 나쁜 남자 포스.(혈액형도 B형이다.)
당시 남편을 사귀고 있었는데 우리 회사가 대놓고 밥을 먹던 식당 아주머니가 다릴 놓았다. 같이 밥을 먹는 모 처(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곳)에 있는 누구가 나를 보고 소갤 시켜달란다. 내가 사귀는 사람이 있다는데도 아직 결혼한 건 아니잖아? 하면서 딱 한 번만 만나보라는 것이다.
하긴 그냥 만나만 보는 거야 뭐. 하면서 만났다.(아주머니는 그 사람이 하도 부탁을 하니 귀찮았나 보다. 맛있는 음식을 공짜로 주시면서 간절히 말씀하시는 것이다.)
본의 아니게 양다리를 걸치게 되었다.(나처럼 덜렁대면 양다리는 못 걸친다. 남자들 이름을 바꿔 부르질 않나, 다른 사람이랑 본 영화를 같이 봤다고 박박 우기질 않나.)
비교가 시작되었다. 남편은 이유 없이 자신감이 넘쳐 보이고 그 사람은 내 앞에서 이유 없이 떨고 앉아있고.(나중에 아이들을 낳아 기르면서 더 사랑하는 사람이 덜 사랑하는 사람에 비해 찌질해 보일 수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알고 보니 그 사람은 말 주변이 없고 못난 사람이 아니었다.
하루는 방송화면에 낯익은 얼굴이 나온다. 엄청난 성공신화의 주인공으로. 이름은 가물가물했지만 그가 속한 집단 이름이 유명해서 알아보니 그 사람이 맞았다. 그 후로도 텔레비전과 잡지 등 그가 여기저기 나오니 미치겠다. 인품은 또 어찌나 훌륭해 보이는지.
나는 당시 20대 후반이었다. 남자의 인품을 먼저 본다든가, 수백억 대박을 칠 사람인 줄 미리 알아보는 게 어려웠다.
20대에는 누구나 돈이 없고, 인격이나 성격이 미완의 상태다. 우린 그 미완성품을 단 한 번에 결재해서 구매하는 것이다.
결혼은 이미 커다란 빚을 안고 들어가는 게임이다. 누구나 이때 자기 한도를 다 끌어모아서 카드로 긁었다. 그리고는 평생에 걸쳐 그 할부금을 갚는다.
비록 큰 무리는 했지만 그 물건이 괜찮은 것이었다는 걸 알게 되면 할부금 갚는 일이 보람되다.
하지만 알고 보니 불량품이었을 경우 반품하는 경우도 생긴다. 반품비용이 만만치 않지만, 어쩔 수가 없다. 할부금 갚는 일이 적어도 의미 있게 힘들어야 하니까.
이 한 번의 구매 결정에서 누구나 자기가 한 선택이 최선이었다고 믿고 싶다. 하지만 과연 제대로 알고 하는 결혼이 얼마나 될까? 10년 연애해서 결혼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몇 달 뒤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사람임을 알게 되기도.
게다가 '결혼'이라는 '대형 구매 사건'에는 삐끼도 합세한다. 눈이다. 한 때 우린 특정식물의 포장지(콩깍지) 홀로그램에 취한 적이 있다.
결혼을 결심할 때 배우자감 외모는 별론데 인간성이 좋아서, 성격이 좋아서 라고 말하지 않는다. 아니 적어도 겉으로만 그렇게 말할 뿐이다. 속으론 이 지구에서 가장 잘생기고 예쁜 사람이 자기에게 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곧 내 눈이 저지른 만행을 만회하느라 법석을 떤다. 남편이 황금비율 몸매였다고 생각했는데, 7도 아니고 6.5 등신이었다니? 하면서.
그 비율을 결혼 전으로 되돌리느라(?) 이 옷 저 옷 사다가 입혀본다. 신체가 무슨 고무줄이라도 되는 줄 아는지.(엄청 살이 쪄서 실제로도 결혼 후 비율이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는 건 좀 슬픔.)
눈의 만행 말고 한 때 잠깐만 뇌에서 분비되던 화학물질을 규탄하기도 한다.(그 호르몬 때문에 우린 가상현실 속에서 평생 살 예정인 적도 있었다.)
사랑하면 됐지, 돈이 뭐가 중요해. 아메리카노 한 잔 시키고 카페에 둘이 하루 종일 앉아 있어도 시간 가는 줄 몰랐던 때가 있었다. 돈이 없으면 조금 먹고 조금 배설하지 뭐. 하는 생각으로 경제관념은 무시한다.
하지만 막상 결혼 준비를 시작하면서, 뭘 하든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돈문제는 다른 것에 비해 빨리 무너지는 편이다. 특히 내가 좀 못 먹고 못 입는 것은 괜찮은 데, 아이가 먹고 싶어 하는 걸 못 사줄 땐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 지기도.
하지만 시간을 되돌린다고 한들 어쩌겠는가? 이미 내 아이들 얼굴을 본 이상.
혹시 이 아이들을 태어나게 하기 위해 수많은 공범자들이 공모한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들기도 한다.
공범자들이 뚫지 못하는 철벽남, 철벽녀들도 있다. 평생 빚지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인생을 퍽 계획적으로 산다. 자기 분수에 맞지 않는 과소비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 물건을 구매할 때도 체크카드만 쓴다. 결혼마저도 빚지지 않는다.
50이 넘어서 결혼한 친구가 있다. 전처소생이 있긴 하지만 이미 다 컸다. 나이가 들어서 한 첫 결혼인만큼 신중에 신중을 거듭했다. 남편은 돈도 많고 잘해주고 건강한 사람이다.(생각해 보면 돈이 많으면 잘해주고 건강하기가 쉽다.) 대신 친구 나이가 너무 많아 자기 아이를 낳긴 힘들다. 하지만 원래부터 아이들은 딱 질색이라 괜찮다고 한다.
사람마다 행복의 조건이 다르다. 그리고 모든 걸 충족시키는 결혼은 없다.
무엇이 부족하든 무엇이 충족되든, 자기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을 만족시켜주는 결혼이 가장 잘 한 결혼인 것 같다. 그 외 부분에 대해 비판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어진다. 그렇다고 반품했다가 여기저기서 좋은 물건이라는 후기가 넘쳐날까 봐 주저한다. 게다가 가까이서 오래 같이 살다 보면 객관적인 평가가 어려워진다.
그런 의미로 볼 때 결혼을 잘(?) 한 나.
오늘 저녁엔 무슨 찌개로 그 할부금을 갚을까? 몇십 년 전 살짝 충동구매한 물건을 위해.
희망을 품어본다. 비록 내 눈과 호르몬이 진 빚 덕분에 평생 할부금 갚느라 허덕이지만, 내가 참 좋은 물건을 샀다고 느낄 날이 온다고.
그보다 먼저, 까짓 거 내가 남편보다 훨씬 더 멋진 물건이 되고 말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