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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Jul 27. 2019

적어도 내 결혼에선 쇼펜 하우어가 이겼다.

결국 나는 그의 말대로 결혼을 한 것이다.

대학 4년 내내 연애다운 연애를 못해봤다. 남들은 캠퍼스 커플이니 3년 연애니 많이들 했지만 나는 고작 미팅에서 만나 몇 번 더 보는 게 전부였다. 남성 혐오증이 있던 것도 아니고 공부에 매진하느라 그런 건 더더욱 아니었다.


나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여대생일 뿐이었다. 멋진 남자 보면 사귀고 싶어 하는. 적어도 한 권의 책을 읽기 전까지는 말이다.


젊은 시절 나는 서울 정독 도서관에 파묻혀 책 읽기를 즐겼다. 그 도서관에는 신간도서 거의 없었고 너덜너덜한, 고서에 가까운 책들이 듬성듬성 꽂혀있었다. 고리타분하게도 그런 책들이 좋았다. 시대에 뒤떨어지지만 묵직한 주제를 담은 책.


그중 하필 내 눈에 뜨인 책이 쇼펜하우어의 '연애론'이었다. 책 내용을 기억나는 대로 적어본다.

1. 연애는 남녀가 2세를 만들기 위한 동물적인 본능에 의해 이끌려 이루어진다.

2. 남자가 선호하는 여자 외모로 큰 가슴, 큰 엉덩이, 가는 허리, 가는 발목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출산과 수유에 유리한 체형이기 때문이다.

3. 중매결혼보다 연애결혼이 더 빨리 깨지는 이유는 그 동물적 끌림이 워낙 강해서 결혼하고 아이를 출산하면 그 목적이 사라지기 때문에 감정이 곧바로 식는 것이다.

4. 여자가 남자에게 끌리는 조건을 보면 남자는 아이를 낳는 객체가 아니므로 외모를 크게 보지는 않는다. 단 키가 커야 골격이 큰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생각에 큰 키를 선호한다. 또한 의지력이나 지능은 아빠를 닮는 경우가 많으므로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선호한다.

5. 남자들이 중년이 되어 동성애에 빠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자신의 정자가 늙어서 건강하지 못하니 2세가 태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본능이 깔려있다.

6. 처음부터 강한 끌림에 의해 결혼하면 안 된다. 이는 자신이 순전히 2세를 낳기 위한 도구로 쓰일 작정이므로. 이 목적이 충족되면 사랑이 급격히 식기 시작한다. 따라서 외모의 끌림보다는 정신적으로 대화가 되고 오래 지켜본 후에 자신과 잘 맞는지 보아야 한다.


대략 이다. 한 참 뒤에 나온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나 '만들어진 신'의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어찌 보면 다윈의 '진화론' 연장선상에 있다.


내게 충격이었다. 그 책 내용을 여기저기 설파하고 다녔지만, 주변에 그 책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어쩌면 그 내용을 믿고 싶지 않았던 게다.

"그래서 어쩔 건데".

"뭐? 그래서 연애하는 게 기분 나빠? 그래서 끌리던 저래서 끌리던 좋으면 만나는 거지."


그리고 다들 쇼펜하우어가 연애에 관해 썼다는 걸 의아하게 생각했다. 철학자는 철학을 해야지 무슨 연애론이야? 하는.


알고 보면 '연애론' 책 내용 자체가 가장 큰 염세주의가 아닌가? 저출산 국가에서는 이 책을 판매 금지해야 한다. 자신이 후세를 만들어내기 위한 출산 기계로 쓰이고 버림받는다는 걸 어느 젊은이가 좋아하겠는가?


적어도 나는 그 책을 읽었고 기분이 나빴다. 누가 나를 좋다고 하면 속으로 그랬다.

'얘가 나를 출산 기계로 보는구나. 절대로 넘어가지 말아야지.'


결국 4년 내내 연애 한번 제대로 못하고 졸업했다. 진상짓도 많이 했다. 나보고 남학생이 예쁘다고 말하면 대놓고,

"그거 유전인자가 속삭이는 거예요. 속지 마세요. 만약 나랑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금방 사라질 감정이거든요."

 

하지만 알콩달콩 연애하는 친구들을 보면,

'그래. 본능이고 출산 도구고 뭐고 외로운 것보단 낫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쯧쯧. 지 혼자 세상 잘난 척은 다 하더니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지.' 하고 후회하기도.

 

그렇게 외로운 대학시절이 지나 사회생활을 하면서 연애란 걸 하고 결혼을 했다.

 

어제저녁 우리 집 풍경을 묘사하자면 이렇다. 나는 방안에 들어와 책을 읽고, 남편은 아들과 딸이랑 치킨 시켜놓고 텔레비전 보며 거운 대화에 빠져있다. 치킨과 텔레비전, 이 둘은 내가 아주 싫어하는 것들이다.


소파에 앉은 자세부터 말하는 표정, 얼굴, 식성 등 셋은 판박이다. 나만 외딴섬에서 온 사람의 취향과 모습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남편은 나랑 모든 게 반대다. 자연식 좋아하는 나랑 다르게 인스턴트 음식을 좋아하고, 키가 보통인 나에 비해 180이나 되고 콧대가 선 나에 비해 콧대가 둥글둥글하고, 책 좋아하는 나랑 반대로 세줄 이상 못 읽고, (다행이다. 브런치에 그 어떤 내용도 맘껏 쓸 수 있어서) 알레르기 피부인 나랑 반대로 피부가 튼튼하고, 조금만 걸어도 헉헉대는 나랑 달리 학교 다닐 때 장거리 달리기 선수였고, 조급한 나에 비해 쓰나미가 몰려와도 천천히 걸을 사람이고, 금사빠, (금세 사랑에 빠지고) 금사식(금세 사랑이 식는 타입)인 나에 비해 뚝배기 같은 사람이고 쌍꺼풀 있는 나랑 달리 외꺼풀이다.


서로 모든 게 반대인 남녀가 만난 셈이다. 남편이 나랑 똑같았으면 아이를 낳기 전에 헤어졌을 듯.

하지만 어쩐 일인지 남편을 좋아하게 되니 남편 닮은 아이를 낳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거다.


아이들을 싫어한 나는 남편을 만나기 전엔 결혼하더라도 아이는 낳지 않을 작정이었다. 더더군다나 본능적인 끌림에 의한 결혼을 하지 않겠다. 절대로 출산 도구가 되지 않겠다 라며 몸부림쳤만...


나는 지금 아이들만 보면 좋아 죽는다. 나랑 모든 면에서 반대인 남편을 만나 낳은 아이들이다. 그 아이들이 남편과 나의 장점만 쏙 빼서 태어났으면 오죽 좋았을까? 단점을 조합한 것이 훨씬 다. 하지만 나에게 없는 것들을 가지고 있는, 나랑 비슷한 객체를 보는 즐거움이 크다.


쇼펜하우어의 연애론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남편에게 끌린 본능은 나랑 너무나도 다른 객체에서 오는 매력이었던 셈이다. 즉 나의 단점을 보완해서 더 멋진 2세를 낳고 싶은 동물적 본능이 합세한 결과, 결혼에까지 이른 것 같다.


내가 그토록 경계하던, 한 염세 철학자의 이론을 몸으로 증명해낸 셈이다.

적어도 이 게임에선 쇼펜하우어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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