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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Aug 16. 2019

20대의 나에게 쓰는 편지

영화 '어바웃 타임'을 보고 내 과거로 가보았다.

안녕, 진짜 오랜만이다. 아니 처음이다. 신기하지? 이렇게 50세가 넘어서 너에게 편지 쓸 생각을 하다니.


계기가 있었어. 영화를 봤거든. '어바웃 타임'이라는 건데 시간여행자의 이야기야. 영화에 깊이 감동받다가 문득 내 20대로 한번 가보면 어떨까 싶더라고. 내가 20대로 가면 무엇을 바꿀까 하고 말이야. 아무리 영화를 보았고 해도 내게 이런 아이디어가 떠 오르다니. 하긴 요즘 시간이 많긴 해. 지금은 방학이거든.


놀랐다고? 방학이라는 말이 나와서? 그래. 짐작한 대로야. 다시 학교로 돌아왔어. 그토록 하기 싫어하던 교사를 다시 하게 되었지. 그래 그래. 알았으니까 심호흡하고 내 말을 잘 들어봐. 내게 배신감을 느낀다고? 왜 학교로 다시 돌아왔냐고?


지금 너는 학교에 멋지게 사표를 던지고 다른 일을 찾아 헤매고 있는데... 맥 빠지지? 얼핏 들으면 네가 그렇게 꿈꾸던 미래는 오지 않은 것 같지? 그래서 실패한 것처럼 느낄 거야. 그럴 수도 있어.


그런데 나는 아직 실패하지 않았어. 아니 지금까지 한 번도 실패한 적은 없었어. 물론 실수는 꽤 많이 해. 요즘도 늘 실수투성이야. 오늘 낮에는 내가 거래한 은행 지점이 기억이 안 나서 세 군데나 돌아다닌 끝에 알아냈지 뭐야. 이 땡볕에. 그래도 짜증이 안 나던걸? 이렇게라도 운동을 하는 게 어디야? 하면서. 네가 놀랄 만도 하지? 지금의 너 같으면 자책하면서 아까운 시간 낭비했다느니, 내 그럴 줄 알았다느니 야단법석을 떨었을 거야.


그러면서 서점으로 달려갔겠지. 시간 관리 법칙 10가지나 성공의 법칙 등 책을 사다가 밑줄 그어가면서 나 자신을 채찍질했겠지. 물론 그런 책들이 나를 성장시킨 것도 많아. 하지만 진짜로 알아야 할 게 있어. 오늘 그 이야길 해 보려고 해.







이미 지나온 길이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내가 돌이켜 보니 그렇게 험난했던 것만은 아니야. 겪을 땐 내가 가장 비참하고 힘든 인생을 산다고 생각했거든. 지금 네가 그렇듯이. 그런데 말이야. 나는 화려한 성공을 하려고 했지. 돈을 바란 적은 별로 없는 것 같아. 하지만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나고 명예를 얻고 싶었어. 그런 야망에 교사는 어울리지가 않잖아. 그래서 그만뒀지. 첫 학교가 워낙 고리타분해서 결정이 더 쉬웠던 것 같아.


무엇보다 지금 몹시 외롭겠구나. 학교를 그만두고는 가족들에게 돌아가지 않았지. 학교 그만두고 백수로 지내는 걸 보여주기 싫어서. 부모님도 학교 그만둔 걸 이해 못하시니까.


그래서 경제적으로 궁핍한 날들을 보내고 있잖아. 하지만 젊으니까 견딜 만 해. 하지만 지금 내 몸이 골골한 건 그때 먹는 게 너무 부실해서인 것 같아. 늘 편식하는 인생을 살긴 했지. 고기도 싫어하고. 그래도 밥은 잘 챙겨 먹어야 해. 하루하루 영양섭취가 그 사람의 인생을 만들어가더라. 내 친구들과 같이 산에 가면 나만 헉헉대. 그러니까 편식은 절대로 안 돼.


지금 학교를 그만두고 눈부신 미래를 꿈꾸는 너에게 이런 말을 하니 미안하다. 하지만 조금 더 살고 보니 성공이나 행복이라는 건 단순하지가 않다는 생각이 들어. 네가 살고 있던 그 당시 사회 분위기가 그랬지. 참 슬픈 소식 하나 미리 알려줄게. 바로 밑의 동생 세정이는 조금 있으면 이 세상을 떠난단다. 그 동생도 유난히 야망이 넘쳤지. 그 당시 분위기가 그랬어. '4시간 수면법'이라는 책이 인기였을 만큼 다들 잠자는 시간을 쪼개가면서 성공지향적인 삶을 살았어. 대기업에 다니는 남자들은 자식을 낳아도 크는 모습을 보기 힘들었지. 새벽에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니까. 그런 삶에서 무슨 행복이 스며들겠니?


그건 아직도 그래. 세계에서 우리나라처럼 일 많이 하는 나라가 없어. 이 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해. 하지만 예전에 비하면 그래도 나아진 것 같아. 요즘은 토요일은 쉬는 곳이 많거든.


무엇보다 정신적인 멘토가 없는 지금의 너는 마치 어둠 속을 더듬는 기분일 거야. 지금 내 기억에 그런 것 같아. 뭘 해야 할지 무엇이 되어야 할지 항상 물음표였으니까.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나는 단 한 번도 무슨 사람이 되려고 했지, 어떤 사람이 되려고 한 적은 없는 것 같아. 살다 보니 그게 훨씬 중요하더라고.


학교에서도 교사하면 그냥 교사라는 보통명사 안에 내가 들어간 것처럼 느껴졌어. 그 보통명사가 주는 이미지만을 생각했지. 사회 통념상 고리타분하고 순박하고 등등. 그러다 보니 소위 멋진 사-짜가 들어간 직업이 갖고 싶었어. 아니면 유명해지거나. 그래서 이것저것 두드려보고 있지? 하지만 만만치가 않잖아.


그런데 말이야. 지금 보니까 그 보통명사 앞에 자기 이름이 하나 더 붙으면 '고유명사'가 되는 효과가 있는 거야. 누구누구 교사, 누구누구 작가 이렇게 이름 하나 더 붙인 것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결국 what이 아니라 how 였던 거야.



무엇이 되는 것보다는 어떻게 일하느냐, 말이야. 예를 들어 제아무리 대통령, 판사라도 제대로 못하면 철창행이야. 요즘 우리나라가 그래. 지금 너는 상상할 수도 없겠지?


그러니 너무 조바심 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 하루하루 무얼 하든 확신을 가지고 했으면 좋겠어. 지금처럼 다시 교사가 되어도 나쁘지 않아. 학교에 있으니 이렇게 여유로운 방학을 즐기고 있잖아. 사실 둘째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니 다른 일을 하기 힘들었어. 차라리 아이들이 어릴 땐 늦게 들어와도 누구에게 맡기면 되는데 초등학교 들어가니 엄마가 챙겨줄 게 좀 많아야지. 그 공포의 '알림장'은 생각만 해도 끔찍해. 그때그때 챙겨주지 않으면 아이가 다음날 아침 난리가 나는 거야.


그래서 다시 교사의 문을 두드렸지. 일찍 들어오니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갖게 되었어. 결국 아이들 때문에 학교로 온 셈이지만  다른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행복할 때가 많아.


그러니 지금 네가 어떤 결정을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현재, 미래의 너는 후회하진 않는다는 말이야.


사실 넌 지금 50대 이후는 너무 멀게 느껴질 거야. 그 나이가 되면 뭐든 안정이 되고 훌륭한 인격자가 되어 주변 젊은이들에게 멘토 역할을 할 줄 알고 있지? 그런데 그게 아닌 거야. 지금도 여전히 배울 게 많고 불완전해. 하지만 적어도 전처럼 이유 없이 불안하거나 나 자신을 자책하지는 않게 되었어.



즉 뭘 해도 단지 실수로 생각이 될 뿐이야.
실패가 아니라.



지금 너는 항상 여러 가지 길 중에서 고민할 거야. 누굴 만날까? 어떤 일을 시작해 볼까? 이런 망설임. 두 가지 중에 혹은 세 가지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할지 늘 고민했던 것 같아.


결론부터 말하면 무슨 결정을 해도 나는 너를 존중해. '어바웃 타임'에 그런 장면이 나오는 거야. 주인공 아빠나 그 아빠나 또 주인공이나 과거로 돌아가는 이유가 뭔지 알아? 고작 가족과 더 시간을 갖기 위해 은퇴를 일찍 하거나, 아들 결혼식에서 주례하는 도중 사랑한다는 말을 까먹었다고 다시 하는 거야.


주인공도 마찬가지야. 성공이 아니라 일상의 행복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 기꺼이 과거로 돌아갔지. 과거로 다시 돌아가도 굉장한 미래를 꿈꾸지는 않게 된다는 거야. 물론 영화지만 지금의 나라도 그럴 것 같아.


특히 공감이 되는 게 아이와 관련된 거야. 영화에서 주인공이 동생의 교통사고를 되돌리기 위해 과거로 갔거든. 그랬더니 자기 아이가 바뀐 거야. 그러자 과거로 가서 자기 아이를 되찾아오지. 그건 부모라면 아이의 얼굴을 본 이상 어쩔 수 없는 거야.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게 있어. 직업이나 친구나 건강이나 다 소중해. 하지만 가장 소중한 게 뭔지 알아? 바로 너 자신이란다. 너 자신이 그 중심에 있어야 해. 항상 한편에 물러나서 다른 것들을 앞세우지 말고. 그건 참 비겁하기도 하고 초라하기도 해.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 있겠니?


이 세상 누구보다 나 자신을 사랑해야 해. 그게 우선시되지 않으면 결국 남에게 그 화살이 향하더라. 가장 큰 피해자는 친한 친구나 연애하는 대상, 즉 미래의 남편이야.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 남이 하는 말에 쉽게 상처를 받고 오해를 해. 그렇게 해서 좋은 친구나 연인들이 많이 떠나가지. 그런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너 자신을 사랑하렴.


너는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과거의 나니까. 지금 생각해봐도 너만큼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존재는 없는 것 같다. 사실은 오늘 그걸 알려주고 싶었어. 그 외의 것은 네가 충분히 고민하고 결정해. 그리고 절대로 후회하지 마.


무엇보다 밥 골고루 잘 챙겨 먹고. 파이팅!


힌트 하나 줄까? 미래 남편의 모습 궁금하지? 일단 우리 아이들이 나랑 하나도 안 닮고 아빠를 쏙 빼닮았는데 둘 다 코가 둥글둥글해. 그럼 힌트가 충분하겠지? 그럼 이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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