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윤숙 Aug 14. 2019

명대사 남발자가 내던진 왕관의 무게

'한결같음'의 매력까진 좋았는데,

남편에게 감동 적이 있다. 결혼하고 얼마 안 되어서였다. 현관 정리를 하다가 남편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약간 더럽길래 구두약을 꺼내 슥슥 문질렀다. 더러운 구두를 신고 다니면 부인이 게으르다고 생각할 것 같아서.


그때 남편이 무심코 나를 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구두를 휙 낚아채더니,

"나는 내 구두나 닦게 하려고 당신이랑 결혼하지 않았어."

하는 것이 아닌가?(아니, 이런 로맨티시스트를 보았나?)


나는 좋으면서도 당황한 듯 왜 그러냐고 하니까, 앞으로 자기 구두는 닦지 말란다. 내가 현관 구석에 엎드려서 구두를 닦는 모습이 보기 안 좋았다면서.




연애시절부터 지금까지 남편은 한결같다. 오히려 결혼하고 더 잘해준다.(연애할 때 잘해주지 않았다는 뜻) 그러니 나는 조금만 잘해 줘도 고마워한다.


남편이 또 한 번 나를 크게 당황, 내지는 감동시킨 일이 있다.


결혼하고 첫 아이를 낳자 나는 아이에게 푹 빠져 버렸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낳기도 했고, '첫' 자가 붙은 건 뭐든 강렬하지 않은가?


아이 재롱에 빠져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퇴근한 남편을 붙들고는 또 한바탕 아이 자랑을 늘어놓았나 보다.

"오늘 우리 애가 글쎄 어땠냐면... 이런 말을 하지 뭐야."

하면서 조잘조잘 대는 내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남편이 갑자기 엄숙한 톤으로 말다.

"당신. 너무 변했어. 아이가 예뻐서 그러는 건 이해해. 하지만 난 당신이랑 예전에 대화하던 때가 그리워. 아이 이야기 말고도 말이야. 회사 이야기도 진지하게 하고 싶고 영화 이야기도 하고 싶다고.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아이가 조금만 더 크면 잠깐 맡기는 거 어때? 꼭 돈을 벌지 않아도 말이야. 어디 뭐 배우러 다니든가. 그러면 나랑 대화할 거리도 생길 거 같아. 당신이 이렇게 집에만 있으니까 예전 매력이 사라지는 것 같아서 아쉬워."


순간 머리를 망치로 심하게 맞은 듯했다.


당시 남편은 사업을 꽤 잘하고 있었다. 소위 돈을 잘 벌어오니, 집에서 살림만 하길 바랄 터였다. 반대 상황이었으면 내가 기분 나빴을 것이다.

'나가서 돈 벌어오라는 건가?' 아니면 '집에서 애만 보는 게 편해 보여서 배가 아픈가?'


하지만 남편의 말은 자극이 되기에 충분했다. 남편은 예전의 내가 그리웠을 것이다. 통통 튀는 럭비공 같다고 하면서 때론 나를 버거워하기도 했지만.


성급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직 아기가 한창 어린데 뭘 바라는 건지 하고. 남편은 적어도 내가 만의 색깔을 유지하기 원했다.


고마웠다. 그래서 아이를 기르면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보았다. 마침 같은 아파트 단지에 미국인 영어 교수가 살고 있었다. 먼저 그 교수에게 찾아가 아일 데리고 앉아 개인 영어교습을 받았다. 아이가 잠든 시간에 인터넷으로 강의도 들었다. 나중에는 중국어까지 공부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남편 사업이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땐 둘째 아이가 두 돌이었다. 아직 어리긴 했지만 시부모님이 도와주시기로 했다. 또 평소 이것저것 공부한 덕분에 곧바로 나가서 남편 회사 일을 도울 수가 있었다. 나중엔 해외로 나가게 되었는데 평소 해 둔 외국어 공부가 도움이 되었다. 남편이 준 자극이 약이 되었던 셈이다.


남자들이 갖는 딜레마가 있다. 자기가 돈을 잘 벌거나 명성을 날릴 땐 부인이 집에만 있길 바란다. 아이가 어리다는 핑계 내지, 여자가 나가서 벌면 얼마 버냐는 둥 하면서.


그러다가 힘들어지면 부인이 나가서 돈을 벌어오길 바란다. 자기 신념이 무너지는 것이다. 우리 남편은 잘 될 때나 안 될 때나 일 하는 여성을 원했다. 그래서 내가 고생하더라도 늘 당당했다. 좀 서운하기도 하지만 우리 남편의 '한결같음'은 참 그럴싸해 보인다.


남편의 큰 그림이 아니었나 싶다. 사업은 기복이 있으니까. 그래서 나를 준비시킨 건 아닐까? 명대사까지 남발해가면서.


남편이 잘한 것 같다. 아이들이 예쁜 시기는 잠깐이다. 그 뒤로 서서히 예쁘지 않아 지다가 무시무시한 사춘기까지 닥쳐온다. 그땐 엄마도 자기만의 일이나 취미가 있어야 한다. 아이들이 다 컸을 때 갑자기 일을 찾으려면 힘들었을 듯.


시대적인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부부간의 경제적인 문제, 자아성취 개념이 말이다. 단 가사노동과 자녀 양육의 동등함은 멀었다.


우리 남편만 봐도 명대사 남발까지는 잘했다. 단 기타 등등의 무게를 버거워했다는 건 좀.





작가의 이전글 나쁜 것만 기억하는 몹쓸 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