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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Aug 14. 2019

명대사 남발자가 내던진 왕관의 무게

'한결같음'의 매력까진 좋았는데,

남편에게 감동받은 적이 있다. 결혼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현관 정리를 하다가 남편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약간 더럽길래 구두약을 꺼내 슥슥 문질렀다. 더러운 구두를 신고 다니면 부인이 게으르다고 생각할 것 같아서.


그때 남편이 무심코 나를 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구두를 휙 낚아채더니,

"나는 내 구두나 닦게 하려고 당신이랑 결혼하지 않았어."

하는 것이 아닌가?(아니, 이런 로맨티시스트를 보았나?)


나는 좋으면서도 당황한 듯 왜 그러냐고 하니까, 앞으로 자기 구두는 닦지 말란다. 내가 현관 구석에 엎드려서 구두를 닦는 모습이 보기 안 좋았다면서.




연애시절부터 지금까지 남편은 늘 한결같은 부분이 있다. 오히려 결혼하고 더 잘해주는 편이다. 그 말은 연애할 때 별로 잘해주지 않았다는 뜻. 그러니 나는 조금만 잘해 줘도 고마워한다.


남편이 또 한 번 나를 크게 당황, 내지는 감동시킨 일이 있다.


결혼하고 첫 아이를 낳자 나는 아이에게 푹 빠져 버렸다. 아이를 비교적 늦은 나이에 낳기도 했고, '첫' 자가 붙은 건 뭐든 강렬하지 않은가?


매일 아이 재롱에 빠져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퇴근한 남편을 붙들고는 말도 못 붙이게 하고 또 아이 자랑을 늘어놓았나 보다.

"오늘 우리 애가 글쎄 어땠냐면... 이런 말을 하지 뭐야."

하면서 조잘조잘 대는 내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남편이 갑자기 엄숙하고 진지한 톤으로 말다.

"당신. 너무 많이 변했어. 아이가 예뻐서 그러는 건 이해하겠어. 하지만 당신이랑 예전에 대화하던 때가 그리워. 아이 이야기 말고도 말이야. 회사 이야기도 진지하게 하고 싶고 영화 이야기도 하고 싶다고.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아이가 조금만 더 크면 잠깐 맡기는 거 어때? 꼭 돈을 벌지 않아도 말이야. 어디 뭐 배우러 다니든가. 그러면 나랑 대화할 거리도 생길 거 같아. 당신이 이렇게 집에만 있으니까 예전 매력이 사라지는 것 같아서 아쉬워."


순간 머리를 망치로 심하게 맞은 듯했다.


당시 남편은 사업을 잘하고 있었다. 소위 돈을 잘 벌어오고 하니 다른 사람 같으면 오히려 여자가 집에서 살림만 하면서 내조를 잘해주길 바랄 터였다. 만약 반대 상황이었으면 기분 나쁘게 들렸을 것이다.

'나보고 나가서 돈을 벌어오라는 건가?' 아니면 '내가 집에서 애만 보는 게 편해 보여서 배가 아픈가?'


하지만 남편의 그 말은 나에게 자극이 되기에 충분했다. 남편은 내게서 친구 같고 동료 같은 예전이 그리웠을 것이다. 통통 튀는 럭비공 같다고 하면서 때론 나를 버거워하기도 했지만.


성급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직 아기가 한창 어린데 뭘 바라는 건지 하고. 남편은 적어도 내가 만의 색깔을 유지하기 원했다.


고마웠다. 그래서 아이를 기르면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보았다. 마침 같은 아파트 단지에 미국인 영어 교수가 살고 있었다. 그 교수에게 찾아가 아일 데리고 앉아 개인 영어교습도 받고 아이가 잠든 시간에 인터넷으로 강의도 들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중국어까지 공부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남편 사업이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땐 둘째 아이까지 태어나 두 돌이 지나 있었다. 아직 어리긴 했지만 시부모님이 도와주시기로 했다. 또 평소 이것저것 공부한 덕분에 곧바로 나가서 남편 회사 일을 도울 수가 있었다. 게다가 해외로 나가게 되었는데 평소 해 둔 외국어 공부가 도움이 되었다. 남편이 나에게 준 자극이 약이 되었던 셈이다.


가끔 남자들이 갖는 딜레마가 있다. 돈을 잘 벌거나 전문직으로서 명성을 날릴 땐 부인이 집에서 아이만 기르고 자길 뒷바라지해주 바란다. 아이가 어리다는 핑계 내지, 여자가 나가서 벌면 얼마 버냐는 둥 하면서.


그러다가 만약 사업이 힘들어지면 그땐 어쩔 수 없이 부인이 나가서 돈을 벌어오길 바란다. 그땐 자기 신념이 무너지는 것이다. 우리 남편은 잘 될 때나 안 될 때나 나에게서 일 하는 여성의 모습을 원했다. 그래서 내가 고생하더라도 미안해하는 게 아니라 늘 당당했다. 좀 서운하기도 하지만 우리 남편의 '한결같음'은 참 있어 보이는 효과가 있다.


지금 생각하면 남편의 큰 그림이 아니었나 싶다. 사업이라는 게 어차피 기복이 있어서 잘되다가 안 되기도 하니까 나를 미리 준비시켜 놓은 것이 아닐까? 이왕이면 명대사까지 남발해가면서.


남편이 잘한 것 같다. 아이들이 예쁜 시기는 아주 잠깐이다. 그 뒤로 서서히 예쁘지 않아 지다가 급기야는 무시무시한 사춘기까지 닥쳐오게 된다. 그땐 엄마도 자기만의 일이나 취미가 있어야 한다. 만약 지금처럼 아이들이 다 컸을 때 내가 준비해 놓은 것이 없고 갑자기 일을 찾으려면 힘들었을 듯.


시대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게 느껴진다. 남녀가 결혼 후 경제적인 문제뿐 아니라 자아성취 개념에서도 말이다. 단 가사노동과 자녀 양육에 있어서의 동등함은 아직이다.


우리 남편만 봐도 내게 명대사 남발, 거기까지는 아주 잘했다. 단  가사노동이나 아이 돌보기 같은 무게를 감당하긴 버거워했다는 사실은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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