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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Sep 20. 2019

'살인의 추억' 아니, '싸움의 추억'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은 남자의 이야기

유발 하라리 근작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는 4차 산업혁명으로 많은 사람이 노동현장에서 소외될 것에 대한 해법, 즉 '무용 인간'에 대한 해법이 등장한다. 국가가 가사노동에 주는 임금이다. 혁신적이다. 





최근 유명 연예인 부부 이혼 문제에서도 가사노동에 대한 대가성 이야기가 등장했다. 그들은 가사도우미가 다 해주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여자 연예인이 가사노동의 100% 를 했다면서 일당 3만 원을 요구하고 나섰다. 하루 종일 일한 건 아니겠지만 적다는 생각이다. 유명 스타라면 몸 값이 얼만데. 


내가 남편과 싸우는 주제도 늘 가사 배분이다. 예를 들어 남편이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는데 내가 빨래통을 들고 그 앞을 지나가면서 한숨을 쉰다. 그때 내 한숨이 반복이 되는걸 눈치 못 채면 전쟁이다. 살기가 번뜩이는.


화두는 공평성. 내가 느끼기에 가사노동은 2:8 정도로 내가 더 한다. 이 구도는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일명 우리 부부 '싸움의 추억' 


시간을 약 1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때는 남편과 항상 치열하게 싸웠다. 초저녁부터 싸우기 시작하다 창밖에 동이 튼 적이 있을 정도.


어느 날 저녁이었다. 양육과 가사노동에 지친 내가 대화 좀 하자고 했다.(이럴 때 남자들이 제일 긴장한다. 또 시작이구나 하면서) 내가 그날 지쳤던 모양이다. 그래서 남편에게 꼬치꼬치 따지기 시작했다. 오늘 내가 무슨 일을 했는 줄 아느냐. 당신은 무슨 일을 했느냐부터 시작해서 이렇게 안 도와줄 거면 왜 결혼했고 아이는 둘이나 낳았느냐, 하나만 낳자니까 했다. 


그러다가 남편의 인간성부터 온갖 기억을 동원해서 신경을 긁었다. 그러자 화가 났나 보다. 자기도 할 만큼 한다면서 내 성격이 안 좋은 줄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충격이었다. 호흡을 가다듬고는 그럼, 왜 나랑 결혼했느냐고 하니까 그걸 안 건 너무 늦은 때였다고.


발끈해서 그랬다. 그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헤어지면 될 거 아니냐고.(아이가 둘인데 이제 와서) 그러자 끝이 안 날 거 같다며 자릴 뜨려고 했다. 내가 다시 앉히며 계속하자 말로 하면 감정적으로 나오니까 글로 쓰자고 했다. 


편지로 써서 서로 교환해서 읽자고. 이를 악물고 알았다고 했다. 서로 등을 돌리고 각자 종이에 한 바닥씩 써 내려갔다. 내가 쓴 내용은 대충 이랬다. 

'내가 오늘 일 한 것은 빨래, 설거지, 아이들 목욕시키기, 밥하기, 신발정리 등등.. 그런데 당신은 뭐했냐, 같이 일하면서 너무 하지 않느냐, 이러려고 내가 결혼했나 하는 자괴감이 든다 등등등. 내가 성격이 못 된 게 아니라 자기가 일을 안 도와주니 악에 받쳐서 그런 거다.'

그렇게 한참 쓰고 있는데 남편이 다 쓴 모양이다. 서로 바꾸잔다. 


쓸 게 더 많았던 나는 일단 씩씩거리면서 남편 편지를 받아 들고 읽기 시작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생각나? 그때가 겨울이었지. 당신은 마스크 끼고 모자 쓰고 안경까지 써서 얼굴이 제대로 안 보였어. 근데 젊은 아가씨가 거친 건축 현장에서 참 열심히 일하는구나 생각했지. 그리고 그 뒤로 우리가 이렇게 결혼하고 아이를 둘이나 낳았다는 게 꿈만 같아. 


당신이 지금 나에게 물었지? 성격도 안 좋은데 왜 자기랑 결혼했냐고? 그건 말이야. 당신은 반딧불이이기 때문이야. 당신이랑 같이 본 영화 '클래식' 기억나? 거기 주인공 둘이 시골길을 헤매다가 반딧불이를 보게 되잖아. 그때 둘이 너무 행복해하는 장면. 반딧불이가 주인공들에게 길을 찾아주진 않았지. 하지만 그냥 이유 없이 행복하게 해 주었어. 당신이 내게 그런 거 같아. 이렇게 막 싸우고 욕하고 해도 그냥 같이 있으면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 그래서 당신이랑 결혼한 거야. 지금은 아직 둘 다 부족한 게 많지. 하지만 그냥 같이 있으니 행복해.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이나 그때나 변함이 없어.'


머리가 띵했다. 갑자기 스쳤다. '지는 게 이기는 거다.'라는 고전적인 속담이.

그리고... 하필...'반딧불이라니, 내가?'





그 뒤로 나는 아주 정숙한 여인이 되어갔다. 적어도 반딧불이와 악악대는 캐릭터는 어울리지 않으므로.

그리고 우리 집 가사노동 배분은 자연스레 비대칭 구조가 되어갔다. 혹시 감정적인 내 성격을 알고 있는 남편의 큰 그림은 아니었을까? 의심이 든다. 


어제저녁 일이다. 집안일하느라 동동거리는데 텔레비전 보는 남편을 보면서 한숨을 훅하고 내쉬었다. 그리고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마침 그때 뉴스에 오랫동안 잡히지 않고 활보하던, '살인의 추억' 범인이 잡혔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남편을 흘끗 보았다. 우리 집 '싸움의 추억' 주인공은 20여 년째 소파 위에서 활개 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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