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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Sep 25. 2019

깎다

우리는 대체 무엇을, 어떻게 깎아야 하는가?

연필을 깎다

내가 어릴 적 연필깎이는 돈 좀 있는 아이들이나 갖고 있었다. 교육에 관심이 많은 부모들은 아이들 연필을 깎아주시곤 했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직접 연필을 깎았다. 그렇게 밤마다 연필을 깎던 아이들에게 격려성 말이 돌았다. 


연필을 잘 깎는 학생이 공부도 잘한다 



이 말이 연필 깎아주기 귀찮은 어른들의 자기 합리화였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맞는 말이다. 


-무엇이든 잘하려면 많이 해보는 수밖에 없다. '생각의 탄생'이란 책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물리학을 아무리 깊이 있게 공부한다 해도 직접 물건을 제작해서 사용해보는 사람이 물리학의 원리를 더 이해하고 있다는  말, 즉 몸으로 직접 경험하고 실수를 반복하면서 깨달은 지식이 문제 해결에 훨씬 유리하다는 것. 연필을 많이 깎아 본 사람이 잘 깎을 수밖에 없다. 


또한 연필을 많이 깎으려면 그전에 연필심을 많이 썼어야 한다. 그 말은 공부를 많이 했다는 말이 되고 공부를 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칼로 쓰는 건 어린 학생들에게 위험할 수 있다. 잘 못 하다간 손을 벨 수 있고 신경을 건드리면 큰일 난다. 그러니 이에는 조심성 있는 성격이 요구된다. 진중하고 집중력이 있으면 같은 시간 같은 수업을 들었어도 기억력이나 이해력이 높아져 공부를 잘할 수밖에 없다.


'깎는다'는 말은 연필뿐만 아니라 물건 값을 깎을 때도 쓰인다. 물건 값이 비싸다고 느낄 때다. 우린 불필요하거나 없었으면 하는 것들에 대해서 깎아버리고 싶다. 


그런데 상대방을 깎아내리거나 제살을 깎아내리는 사람도 있다. 여기서 깎는 건 불필요해서가 아니라 자기에게 불리해서다. 


요즘 언론, 의회, 검찰에 대해 느끼는 것이 그것이다. 그들은 대체 무얼 깎아야 하는지에 대해 알고나 하는 걸까? 진짜로 깎아야 할 것을 깎아야 하는데... 


깎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권력 집중

-유전 무죄

-왜곡 보도

-친일 뿌리

적어도 위의 네 가지 정도는 이제 깎을 때도 되지 않았나?


반면 깎지(깎아내리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정의 구현

-헌법 준수

-진실 보도

-민주 시민


요즘은 연필을 직접 깎아 쓰는 학생이 드물다. 잘못하다간 손을 벨 것이다. 나는 지금도 연필을 깎을 때 신경 쓰던 손놀림이 기억난다. 불필요한 연필의 나무 부분을 칼로 슥슥 베어내고, 뭉툭했던 연필심을 나무에게서 드러내며 살살 갈아낸다. 여기서 연필깎이에 능숙한 학생과 서툰 학생이 차이가 난다. 서툰 학생은 연필심을 너무 뾰족하게 해서 깎다가 부러뜨리거나 고르게 갈아내지 못한다. 


그렇게 잘 갈아낸 심으로 사각사각 글씨 쓸 때의 기분을 잊을 수가 없다. 요즘처럼 샤프펜슬로 쓰거나 자동 연필깎이로 뱅그르르 돌려서 깎은 연필로는 그 기분을 맛볼 수가 없다.  


연필을 '잘 깎는다'는 말은 칼이라는 위험한 도구를 잘 다룬다는 말이다. 사법부와 언론(펜은 칼보다 더 강하다)은  '칼'이다. 칼자루가 쥐어졌을 때 깎을 것만 깎아내고 깎지 말아야 할 것은 남겨두는 것, 그것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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