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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Oct 04. 2019

나라도 멋있지 뭐.

대부분의 찌질하고 이기적인 세상 사람들 속에 살아가는 일

핸드폰을 시외버스에 두고 내렸다. 며칠 전 일인데 바빠서 못 찾다가 어제 그 버스를 타서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기사분 말씀이 종점 차고지까지 가서 찾아보란다. 그런데 마침 비가 와서 두 시간 거리가 세 시간이 넘게 걸렸다.


늦게까지 안 들어오니 남편이 전활 했다. 내가 세 시간째 차에 갇혀 있다니까 쯧쯧 거리면서 날 놀리는 거다.

집에 늦게 와서는 그 이야기를 딸에게 했다. 그러자 남편이 말한다.

"한두 번이어야 놀라지 이젠 놀랍지도 않아."


그렇게 티격태격하는 걸 지켜보던 딸이 오늘 그런다

"아빤 요즘 너무 꼰대화 되어가고 있어. 그런 상황에서 엄말 위로해줘야지 놀리잖아. 그런데 이해가 안 가는 게 엄만 또 그걸 농담으로 받아주고 화를 안내. 보통 그러면 여자가 삐지잖아."


내가 그런다.

"내가 평생 사고를 치니까 그렇지. 아빠도 얼마나 답답하면 그러겠니? 그리고 이제 나이가 드니 삐지는 것도 다 귀찮다. 일단 명분이 별로 없고."





역시 딸은 엄마에게 든든한 친구가 된다더니 요즘 우리딸은 철저히 내 편이다. 그 이야길 남편에게 했다. 아빠가 잘못한 거라고 했다고. 그러자 남편이 하는 말이 어젠 나보고 엄말 이해할 수 없다고 하던데? 걔은 원래 그 자리에 있는 사람 편을 들어. 그래서 자기가 뭐라고 했어? 하니 엄마가 그래도 요리는 잘하잖아. 했지


듣고 보니 우리 딸의 전략이었다. 나도 딸이 아빠 흉을 보니 기분이 나빠져서 남편 편을 들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냐. 아빠 나이 때에 있는 남자들이 다 그래. 이제 자길 혼낼 사람이 없고 생각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으니 꼬여 있고 가족들에게는 기죽기 싫고 하니 엄포부터 놓고 보는 거야. 그래도 아빤 우리에게 맛있는 빵도 구워주고 평소 자상하잖아. 그리고 완벽한 부부는 이 세상에 없어. 둘 다 멋있는 사람이면 좋겠지만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원래 대부분 이기적이고 찌질하거든. 기껏해야 한쪽이 좀 멋있는 경우야. 그럴 경우엔 싸움을 좀 덜하겠지.

너라면 남자가 멋있는 게 좋니? 아니면 너 자신이 멋있는 게 좋니? 둘 중에 딱 한 명만 멋있다면 말이야. 나는 내가 더 멋있는 게 더 멋진 거 같아. 어쨌든 이 세상의 주인공은 나니까"


그때 나를 쳐다보던 딸의 존경스러운 눈빛이란. 그러면서 천천히 대답한다.

"그야 뭐... 나도 내가 더 멋있을 거야."





나이가 많아지면서 내 나이를 크게 실감하는 것이 있다. 사회적인 통념이나 이슈가 흥망성쇠를 겪는 과정을 지켜볼 때다. 예를 들어 여자 말띠는 팔자가 사나워 평생 자기가 벌어먹어야 된다든가(그게 뭐 어때서? 지금 나처럼 내가 스스로 나를 먹여 살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자랑스러운데) 여자는 혼전 순결은 꼭 지켜야 한다든가(그럼 남자는요?) 또 출가외인이라는 말이나(요즘은 딸 가진 부모가 더 호강하는 시대) 여자를 밖으로 돌리면 안 된다는 말(요즘 남자들은 여자 만날 때 맞벌이를 기본으로 생각함.) 등등.


이렇게 그 시대에 맞는 패러다임이라는 게 있다. 나는 그중에서도 가장 모순된 것이

'여자는 시집을 잘 가야 한다'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

'여자가 너무 나대면 집안이 망한다.' 이 말은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정치적인 색채가 보여서 이 말은 차마)의 순화 버전이다.


요즘 어디 가서 이런 말을 했다가는 삼족이 멸하게 될 것이다. 이제 여자도 남자와 똑같이 능력을 발휘하는 시대다. 학교에선 오히려 여자가 성적이 더 좋다. 여자는 남자들에 비해 게임이나 특정 영역의 동영상 유혹에 강하다. 그러다 보니 시간 안배를 잘해서 시험 등에서 유리하다.


그런데 문제는 요즘 20대들의 성 대립 양상이다. 요즘은 페미니즘이 이상하게 변질되어 가고 있다. 진정한 페미니즘이 뿌리를 제대로 내리기도 전에 온갖 농약을 쳐서 썩게 만들고 있다. 양성이 다 같이 평등하자면서 왜 서로 차별 운운하고 대립각을 세워야 하는가?


개인적인 가설이지만 요즘 딸과 아들이 섞인 형제가 별로 없어서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아들만 둘이거나 딸만 둘인 집 아니면 아들 하나 거나 딸이 하나인 집이 상대적으로 많다. 생물학적인 근거가 있는지 모르지만 속설에 의하면 여성의 체질이 아들을 낳기 좋은 체질과 딸을 낳기 좋은 체질이 따로 있는데 그 체질을 바꿔서 낳으려면 출산간격을 벌려야 한다고 한다.


그 속설이 맞다면 두세 살 터울인 요즘 아이들은 성이 같을 확률이 높다. 아니면 외동딸 외동아들이거나. 그러다 보니 요즘 아이들은 다른 성과 부대끼면서 클 조건이 되지 않는다. 형제자매들은 아무리 싸워도 금방 풀리는 혈연관계지만 남에게서는 그런 자연스러움이 성립되지 않는다. 싸우면 그걸로 끝이 나기 십상이다. 그러다 보니 여자와 남자들이 걸핏하면 대립각을 세운다.

 

엄청난 스펙을 쌓아도 취직이 안 되는 세대. 그러다 보니 결혼, 연애, 취직, 내 집 마련, 출산 등을 다 포기하게 되고 남녀는 반목하는 일이 벌어진다. 어차피 넘어가지 않을 영역이니 자신에게 동지는 아닌 것이다.


우리 때는 여자가 남자의 날갯죽지 밑으로 들어가는 걸 최고로 여기는 문화가 잔존하고 있었다. 즉 여자가 시집잘 가는 걸 최고의 행복으로 여겼다. 나는 그 말이 꽤 모순으로 들렸다. 그럼 그 남자는? 예를 들어 동네에 성질이 아주 고약하고 공부도 못했고 집안도 평범한 여자가 있었다. 그런데 단 하나, 미스코리아 출전 권유를 받을 정도로 몸매가 좋았다. 얼굴은 못 생긴 편이었는데 수술과 화장으로 커버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결국 좋은 데로 시집갔다면서 다들 부러워했다. 그 동네 부자로 소문난 집 아들에게다.


그럼 그 아들 입장에선 장가를 잘 간 건가? 못 간 건가? 결혼은 둘이 하는 건데 왜 누군 결혼을 잘한다는 개념이 존재하는 걸까? 둘이 잘 어울리는 게 더 중요한 게 아닌가?


어릴 적 명작동화도 죄다 그런 내용이었다. 착하고 예쁜 공주가 첫눈에 반한 왕자님에게 시집가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


나는 딸에게 항상 강조하는 게 있다. 네가 일단 능력이 있어야 한다. 평생 네가 가장 잘하는 일을 찾고 그 일로 열심히 해서 능력을 키우고 돈을 벌 생각을 해라. 절대로 남편에게 기댈 생각을 하지마라. 그러자 딸이 하는 말이 엄마가 말 안 해도 요즘 여자애들은 당연히 자기가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한단다.


딸에게 말했다.

"만약 남편이 말을 안 듣고 속 썩이는 경우 이불 뒤집어쓰고 삐지거나 하지 말고 당당히 대화로 풀어. 그래도 잘 안 고쳐질 때는 아휴. 멋진 내가 참는다.라고 말해. 부부 중 그래도 누군가는 멋있어야 하지 않겠니? 아이들 보는 앞에서 교육적인 측면에서도 말이야."


이렇게라도 글로 쓰면 위안이 된다. 아무렴 어떤가? 나는 하루하루 사는 목적이 그거다. 궁극적으로 맛있는 거 먹고 떵떵거리면서 잘 사는 게 아니라 하루가 다르게 점점 멋있어지는 사람. 행동이나 말이 아량이 있고 부족한 사람들에게 측은지심을 갖는 것. 그것이다.


아무렴 어떤가. 결혼 생활을 제대로 이끌어 가려면 적어도 한 사람은 멋있어야 된다 그런데 남편 쪽이 그쪽으로 가능성이 제로다. 그 땐...


까짓거 좋아. 그럼, 나라도 멋있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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