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윤숙 Nov 11. 2019

검은색 크레파스

네가 있던 자리

세정아. 잘 지내지?

널 보내고 난 오랫동안 힘들었단다. 그런데 신기해.

내가 요즘 너에 관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거든.

그러자 마음이 편해졌단다. 너를 마치 홀로그램으로 살려낸 것 같아.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제 더 이상 네가 꿈에 안 나온다는 거야. 그 전엔 자주 나왔거든.

꿈에서 깨고 나면 생시인지 꿈인지 구분이 안 갔어. 온몸은 땀에 흠뻑 젖어 있고 말이야.

그런데 널 글로 소환해 내고부터는 꿈에 나타나지 않아.

혹시 그걸 원했던 거니?


오늘은 갑자기 어릴 적 추억이 하나 떠오르지 뭐야.

교내 사생대회를 앞두고 있었던 때 같다.

그때 나는 크레파스 문제로 골치가 아팠어.

크레파스는 우리 자매가 아주 아끼던 물건이지. 우린 둘 다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어.

하얀 도화지가 아니더라도 아무 데나 긁적였지. 지금 생각하면 엄마가 참 무던한 분이었어.

동화책 귀퉁이 아무 데나 그림을 그려도 혼내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평소 너무 많이 썼는지 크레파스가 짝이 안 맞는 거야. 당장 대회에 가지고 나가야 하는데.


내가 엄마한테 크레파스를 새로 사달라고 했어. 그러자 집에 굴러다니는 게 많은데 또 사달라고 하냐고 혼내셨지. 그때 그걸 듣고 있던 네가 집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크레파스를 몽땅 집어왔지 뭐야.

그러더니 크레파스 빈 통을 하나 가져와서 그 속에 하나씩 채우는 거야. (그때 네가 아마 일곱 살 정도였을 거야.)

길이가 짧아진 건 작은 것들을 여러 개 이어 붙여 놓고, 길이가 긴 것은 그대로 두고.

그렇게 색깔별로 정리를 하니 그럴듯한 크레파스 한 세트가 완성이 되었어.

그런데 말이야. 문제가 하나 있었어.

다른 색은 다 있는데 까만색 자리가 하나 비는 거야. 평소 그것만 많이 썼는지. 그러자 엄마는 어쩔 수 없이 새 걸로 하나 사주셨어. 그것도 그 당시 유명했던 상표, '왕자 크레파스'로.


그런데 말이야. 네가 크레파스를 하나하나 정리해서 보여준 게 왜 그렇게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검은색 크레파스가 비어 있던 그 자리 말이야. 그 자리가 지금도 마음에 남아.


겨우 하나 부족한 건데.

얼핏 보기엔 한자리가 비어도 티가 나지 않지.

주황색이나 초록색이라면 어떻게 해볼 수가 있었어.

그건 색을 섞어 쓰면 만들어낼 수가 있었거든.

그런데 검은색은 아무리 색을 만들려고 해도 안 되는 거야. 그런데 어디든 검은색이 조금씩은 필요하거든.

아무리 여러 가지를 겹쳐 칠해봐도 안되었지. 그건 조금 비슷해 보여도 전혀 비슷한 게 아니었어.

게다가 중요한 사생대회를 앞두고 있었잖아. 그림 그리는 데서 가장 중요한 게 크레파스인데 말이야.



요즘 네가 꿈에 안 나오면서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아... 그동안, 오랫동안 내가 그 자릴 비워두었나 보다. 아무 그림도 그릴 수 없게.'


그런데 말이야. 언니가 이제는 그림을 그릴 수가 있을 것 같다. 너를 기억해내고 글로 살려내다 보니 가능해졌어.


그리고 부탁이 있는데 말이야. 딱 한 번만 다시 와서 나랑 같이 그림을 그리면 안될까?.


그 땐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검은색을 여유분으로 많이 준비해 둘 거야.


그때, 우리 자매... 그림에다가 검은색도 맘껏 써보자꾸나.


작가의 이전글 '뉴스의 시대'에 산다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