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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Nov 15. 2019

내겐 너무 위험한 악당들

대한민국 출산 장려 글


한 아이가 다가와서 귓가에 속삭인다.

"선생님. '닭'할 때 ㄱ이에요.ㄱㄹ이에요?"

나도 똑같이 아이 귀에다 대고 속삭인다.

"응. 야."


이런 일이 처음이었을 땐 친구에게 물어보라고 했다가, 자존심에 스크래치 난다는 듯 샐쭉해지는 걸 보고는 직접 가르쳐준다. 아이들에게 철자법 아는 건 어른들아파트 평수 말하는 거랑 비슷하다.

또 한 아이가 온다.

"떤땡틴꾸까나때려떠어요."

"뭐라고?"

"틴꾸우우가 나아 때려 떠여어어."

이렇게 아무리 들어도 못 알아듣게, 극단적으로 혀 짧은 아이도 있다.

그래서 오늘은 절대로 넘어가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건만...

1학년 아이들의 혀 짧은 소리에 그만 또 내 어깨를 혹사하고 말았다.






올해엔 담임을 맡지 않고 고학년 음악수업과 1학년 동아리 수업을 하게 되었다. 동아리 수업이란 한마디로 아이들과 놀아주는 거다. 각종 창의적인 방법으로. 집에서 아이 한 명만 놀아줘도 체력이 달릴 나이에 하루에 많게는 120명과 놀아준다.


1학년 아이들에겐 권위가 있다. 고학년들은 6년간의 사회생활을 통해 자신감이 많이 떨어져 있다. 집에선 자기를 무조건 예쁘다고 해주는 엄마가 있다. 칭찬만 해주면 마치 뭍 위에라도 뛰어오를 기세의 고래 같다. 하지만 학교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자신이 그저 항아리 안의 새우젓 한 마리일 뿐임을 알게 된다.


그 과정을 아직 거치지 않은 1학년 아이들은 마냥 해맑다. 여자 남자 구분도 별로 없고 때론 선생님과 엄마 구분도 없는 듯하다. 나에게 업어달라고 떼쓰는 아이도 있다. 수업이 끝나고 나가려고 하면 문에다 손을 떠억 갖다 대면서 막아서는 츤데레 남자아이도 있다.

"선생님. 못 가요. 선생님을 절대로 보낼 수 없어요."


복도로 나서면 백설공주와 난쟁이 장면이 연출되기도 한다. 나를 중심으로 손들을 잡고 뺑 둘러서서는 블로킹을 친다. 자기들이랑 계속 놀아달라고.


곤란해하면서도 내가 이런 인기를 어디서 얻을까 하며 행복해한다. 

신입교사 시절이 떠오른다. 그땐 아이들이 귀찮았다. 나를 좋아해서 다가오면 일해야 한다고 저리 가라고 하기도. 결혼 해도 아이는 낳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이를 기르면서 자유가 사라지고 힘들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그런 내가 이렇게 바보같이 허허거리다니.


아이들에겐 고 작은 몸뚱이가 뿜어내는 독특한 아우라가 있다. 마치 거인의 몸집을 꾸깃꾸깃 집어넣은 체를 한다. '우리한테 불가능 따윈 없어.'


때론 곤란한 장면도 연출된다. 내가 아이들의 반응이 유난히 뜨거울 땐 오버를 한다. 하루는 떠들길래 아이들 앞에 머리를 풀어헤치고 해치는 시늉을 했다. 물이라면서.

"크아앙. 너희들을 오늘 내 저녁밥으로 잡아먹어야겠다."

그러자 남자아이들이 0.1초 만에 우르르 달려 나오더니 나에게 발길질을 하고 주먹을 날렸다. 괴물을 쳐부수겠다는 의협심으로 똘똘 뭉쳐서. 콩알만 한 주먹이긴 하지만 좀 아프다. 이는 순전히, 아직 다큐와 예능을 구분 못하는 그들의 발달 단계를 깜빡한 내 탓이었다.


한 번은 남자아이가 오랜만에 보니 반갑다며 양손을 위로 번쩍 들고 와락 안겼는데 손의 위치가 하필 내 가슴 위치였다. 이럴 때 천진한 아이 얼굴과 대조적인 민망함은 나의 몫이다. 가지 말라고 매달릴 땐 허리를 붙잡기도. 그들나무 기둥 중간 잡은 거지만 명색이 허리다. 그냥 부위상 그렇다는 말이다. 현재 어디가 허리라고 말할 순 없지만.


어젠 종이접기를 했다. 상자 접기인데 1학년 아이들에게 고난도에 속하는 거라 예상은 했지만, 여지없이 또 몇백 장 접어주게 되었다. 이를 방지하게 위해 종이접기 강사를 임명하여 활용하긴 한다. 즉 같은 1학년 중에서 종이접기를 나보다 더 잘하는 아이들이 있다. 그 아이들은 그 시간을 시시해하므로 강사 자격을 준다. 그리고 '종이접기 교실'이라는 팻말을 책상에 세워놓게 하고 스티커를 아이들에게 나눠주는 특권을 준다. 그러면 으쓱해서 1시간 내내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친다.


문제는 그리로 가기 자존심 상하는 아이들이나 내 공장 제품이 더 좋다는 아이들이다. 그러면 내 앞에 줄을 서는데 한 명 두 명 받아주다 보면 하루에 몇백 개를 접는 일이 생긴다.


그렇게 무리를 한 날은 집에 가서 끙끙 몸살을 앓는다. 아침을 두 끼먹고 단단히 준비를 했는데도. 오늘 아침에 일어나니 눈밑 다크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와 있다. 하루 종일 어디서 맞은 거 같다는 소릴 들었다.


나 혼자 또 중얼거렸다.

"또 당했군. 그 무해하지만 위험한 악당들에게. 하지만 다음 주엔 절대 넘어가지 않을 테야'


글쎄... 그 작은 뚱이들을 당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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