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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Jul 12. 2019

아이들은 별이다

먼지로 뒤덮어서 빛을 가린다고  해도.

나이가 들면서 아이들이 더 예뻐 보이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이런 건 아니었다. 결혼하기 전 아이들은 내게 시끄럽고 귀찮은 존재였다.


첫 아이를 낳고부터 모든 게 달라졌다.


첫 딸이 처음 세상에 나온 날이 생각난다. 출산의 고통 때문인지 찌그러지고 빨갛던 아이. 안쓰럽고 애틋했다. 육아에 대한 두려움은 더 컸다.


수면부족과 새로운 생명을 길러내야 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리던 날들.


아이가 두 달쯤 된 어느 날이었다. 나를 보고 뭐라 뭐라면서 옹알이를 했다.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내 심장 소리가 들릴 정도로 쿵쾅거렸다.

'이 아이가 지금 나에게 뭐라고 진지하게 말을 하네?'

작은 몸을 버둥거리며 온 힘을 다해서 말이다. 그 순간 나는 거대한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 듯했다.


 

사실 우리 아이는 나를 너무 안 닮았다. 하도 안 닮으니 아이가 어릴 땐 지나가는 할머니가 쯧쯧 하면서 이런 말도 하셨다.


"어쩜 애기가 엄말 하나도 안 닮았지? 애기 아빠가 어디서 낳아 온 아이를 엄마가 기르나 보네. 참 착한 엄마도 다 있지." (아무래도 그 할머니는 일일 막장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보신 듯하다.)


내가 출산할 무렵 병원에서 아기가 바뀐 것이 알려져서 갈등을 겪는 방송이 많이 나왔다. 간호사 실수로 말이다.


내가 어릴 때는 유전자 검사 같은 게 없었다. 부모의 혈액형과 자식의 혈액형을 가지고 친자식인지 아닌지 논란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동네 오빠는 학교에서 검사한 혈액형이 자기만 다르다면서 가출한 적도 있다. 나중에 병원 가서 다시 검사해보니 학교에서 나온 결과가 잘 못된 거라고.)


상상을 해 보았다. 만약 병원에서 우리 아이가 바뀌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어떨까? 지금 옹알이를 하는 저 아기가 내 아기가 아니라면? 그럼 저 아이를 주고 내 아이를 도로 찾아올까?


못 할 것 같았다. 핏줄이 뭐가 그리 중요할까? 싶었다. 아이와 함께 한 두 달은 내게 여자가 아닌 엄마로 다시 태어나게 해 준 기간이었다. 지금까지 세상을 바라보던 눈이 완전히 새롭게 열렸다. 처음으로 내가 아닌 남을 나보다 더 사랑하게 되었으니.


그냥 이 아이를 기를 것 같았다. 나를 온전히 의지하는 아이의 작은 몸짓과 옹알이는 나를 충격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원래 출산 후 두 달 뒤에 나는 회사에 나가기로 되어 있었다. 을로 일하던 회사에서 대기업으로 특채가 된 상태였다.


혼란스러웠다. 이 아이는 나만을 의지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눈동자로, 알아들을 수 없는 옹알이로 끊임없이. 모성애는 잔인했다. 그동안 죽도록 관리해 온 나의 커리어를 의미 없게 만들어 버릴 정도로.


그 후 둘째가 두 돌이 될 때까지 5년을 내리 집에서 아이만 돌보게 되었다.


두 아이를 기르면서 내 안에 있던 모성애가 폭발한 것 같다. 주변에 지나가는 아이들까지 다 예뻐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집은 늘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엄마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 오면 잠깐 했던 교사 시절을 떠 올리면서 온갖 창의적인 놀이로 놀아주었다.


심지어 아들 친구가 놀러 왔다가 아들이 없으면 나랑 놀겠다고 한 적도 있다. 나랑 노는 게 더 재미있다면서. 즐겁게 노는 아이들의 눈은 별처럼 빛났다.


학교에 있게 되면서부터는 고맙게도 수많은 별들을 매일 본다. 1학년 교실에 들어가게 되면 아이들 눈에서 레이저가 나온다고 칭찬해 준다. 그러면 아이들이 눈을 더 크게 뜨면서 눈을 빛낸다. 수십 개의 별이 반짝이는 교실에서 나는 행복한 별지기가 된다.


과학을 가르칠 때였다. 하늘엔 별이 많은 데 왜 안 보이는지를 설명했다. 저 하늘엔 분명 별이 있지만 공기가 오염되어 안 보인다고. 선생님이 어릴 땐 보였다고.


그러자 아이들이 눈을 반짝였다.

"진짜로 그땐 별이 보였어요?"


안쓰러웠다. 그래서 휴대폰에서 어플을 찾아 소개해주었다. 별자리를 알아보는 어플이다.


그 어플에서는 현재 내 머리 위에 있는 별자리를 볼 수 있다. 아이들이 핸드폰을 머리 위로 이리저리 옮겨가며 별자리를 들여다본다.


여기저기서 탄성 소리가 나왔다. 이렇게나 많은 별들이 쏟아질 듯 우리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다니.


아이들에게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 그 별들. 나는 속으로 조용히 되뇌었다.


'아이들아. 너희도 별이다. 그런데 늘 먼지에 가려 있구나."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불합리한 입시제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수시로 변해서 입시컨설팅이 필요한 시대. 근본적인 것이 바뀌지 않는 한 이 무모한 썰물과 밀물은 앞으로도 계속될 텐데...


그 안에서 신음하는 아이들이 가엽다. 초등학생 때부터 대입까지 학원에만 매달려 살아야 하는 아이들. 놀 시간이 너무 없는 아이들. 하늘에 별이 있다고 해도 별을 볼 시간조차 없는 아이들.


다이아몬드를 맡겨 놓고는 돌멩이 취급을 당한다.


어릴 적 골목마다 뛰어놀던 어린아이들이 생각난다. 골목길 풍경은 아이들로 인해서 빛이 났다.


밖에 나가 뛰놀며 콧물을 흘리고 먼지를 묻혀와도 그저 아이들은 별이었다. 우리가 먼지로 하늘을 뒤덮어도 별은 언제나 거기 있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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