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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다는 건 아름다운 거란다."
미워하기만 해도 좋아. 곁에 있어줄 수만 있으면.
by
허윤숙
Dec 23. 2019
며칠 전 중학교 남자 동창이
세상을
떠났다.
우리는 송년모임을 앞두고 들떠 있었다. 모임 공지에 제일 먼저 댓글을 단 것도 그 친구였다. 모임까지 20일을 남겨둔 시점이었다.
댓글에, 참석하고는 싶은데, 자신의 몸상태가 남은 20일을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을 곁들였다.
친구 건강 상태도 알고 싶고 얼굴도 보고 싶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몇 년간 동창회에 나가지 않던 나도 참석한다고 썼다. 혹시 그 친구 얼굴을 보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
그 친구는 올해 여름 암 수술을 했다. 국내에서는 두 번째로 발병한 희귀 암인데 첫 번째 환자는 이미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하지만 워낙 수술이 잘 되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지가 엊그제 같은데...
췌장으로 전이가 되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다.
그 친구와 이번 여름에 통화를 한 적이 있다. 내가 인간관계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하자,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미워
하기
만 해도 좋은 거야. 곁에만 있다면. 그것도 일종의 사랑이거든. 그리고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건 내가 살아있다는 확실한 증거야."
몇 년 전 생전 처음으로 봉사를 하게 되었다. 바로 그 친구 덕분이다.
우연히 그 친구가 정신지체 장애우들에게 목욕봉사를 해오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그 해에 인생 최대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 남편 사업이 크게 부도가 났기 때문이었다. 대기업 계열사 어음을 받은 남편이 어음에 배서를 한지 꼭 한 달만에 일어난 일이다.
그리고
그 이후 벌어진 일들은 지옥, 그 자체였다.
한창 위기를 겪을 때 그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러자 자신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자신도 사업을 하다가 타
인에 의해 수억의 빚을 진 이야기였다. 그 이후로 살던 집을 팔고 보험 영업을 하면서 빚을 갚았다고 한다.
그 친구가 하는 말이
,
살아나갈 구멍이 안 보일 때 봉사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힘든 봉사를 하면서 다시금 행복해졌고, 알 수 없는 에너지로 채워졌다고 한다. 자신이 모두 고갈되었다고 느꼈는데, 남에게 줄게 남아있다는 게.
가진 게 없어도
남을 도울 수가 있었다.
그래서 바쁜 와중에도 한 달에 한번 가는 봉사를 기다리게 되었다고 한다. 봉사를 다녀오면 한 달은 가슴이 벅차오르고 에너지가 차올라서
일이 더 잘 되었다고.
그 이야길 듣고 나도 봉사에 합류하게 되었다. 정신지체 장애우 때밀이 목욕봉사였다.
때를 미는 건 일반인 대상으로도 하기 힘든 봉사다.
정신지체 장애우들은 지능이나 감정이 5세 정도에 머물러 있다. 남에게 자신의 때를 밀게 한다는 게 부끄러울 수도 있는데 그들은 마냥 행복해했다. 복지사들 말에 의하면
우리가 오는 날만 기다린다고.
친구는 그 봉사를 적극적으로 주도했고, 같이 참여한 친구들을 일일이 픽업해서 데리고 다녔다.
덩치는 산 만한데 웃을 땐 이를 드러내고 천진하게 웃던 친구.
그 호탕한 웃음소리가 아직도 내 귀가에 남아있는데... 친구는 대체
지금 어딜 간 건지.
나는 또 뭐람?
동창회 모임이 아니라 병원에 미리 한번 갔었어야 했는데...
대신 친구에게 하나는 약속할 수 있다.
"친구야. 내가 이번에 널 못 보고 그냥 보냈구나.
꼭 보고 싶었는데...
혹시
다음에 우리 또 만나게 되면,
되도록
자주 보면서 많이 사랑하고 많이 미워해 줄게. 진짜로 살아있다는 걸, 네가 충분히 느낄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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