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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Jan 02. 2020

추억 냄새

지금은 어떤 냄새로 기억이 될까?

후각이 유난히 발달해서일까? 내게 추억은 냄새와 함께 떠 오른다. 어릴  냄새마다 이름을 붙이는 습관이 있었다. 아빠가 이발하고 와서 내 볼에 뽀뽀를 하면, "이발소 냄새나" 하면서 밀쳐내고, 이웃집에서 떡을 가져오면 '절 냄새'가 난다면서 안 먹었다.






예전 과일들은 지금의 과일과는 다른 향을 지녔었다. 아빠가 저녁에 누런 종이봉투에 사 가지고 오시던 귤은 집에 들어설 때부터 차갑고 쌉싸름한 달콤함을 풍겼다. 사과는 어떤가? 그 시절 사과와 지금의 사과는 분자 구조가 다를 것이다. 그때 사과는 훨씬 단단하고 물이 많고 고집 센 단 맛이 났다. 지금은 너무 물렁한 단맛이 난다. 그 고집은 향으로도 그 도도함이 드러났다. 다디달지만 자신을 쉽게 내어주지 않는 단맛의 향이었다.


요즘은 아파트 시대다. 아파트를 대표하는 냄새는 숨이 거칠어지는 콘크리트 냄새다. 하지만 내 추억의 장소에서는 다르다. 내 어린 시절에는 동네마다 고유의 냄새를 지녔다. 우리 마을은 어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코끝에 달큼한 달고나 냄새가 감겼었다. 여린 내 코는 그 향기에 어질어질했다. 달고나 아줌마가 지닌 향내는 고가의 향수보다 더 치명적이고 행복한 냄새였다.


구멍가게 냄새도 생각난다. 구멍가게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뜨이는 존재가 있었다. 입구에 놓여 있던 사탕 박스다. 칸칸이 나뉜 투명 박스 안에는 눈깔사탕이 색깔별로 누워있었다. 하얗고 끝이 뾰족한 사탕, 동그랗고 나선형 줄무늬가 있는 사탕, 하얀 설탕가루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사탕, 딱딱한 설탕이 코팅되어 있는 사탕, 아주 큰 사이즈에다 단단해서 입안에 넣고 하루 종일 먹을 수 있는 사탕 등.


사탕들은 때때로 녹아내려 사탕 통 바닥으로 흘렀다. 단물이 흘러 끈적해진 사탕 통에서는 끈끈하고 친밀한 단내가 났다. 나는 유난히 사탕을 좋아해서 집에 있다 보면 그 단내가 그리웠다. 그 단내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10원짜리가 꼭 필요했다. 결국 갖은 방법을 동원해서 10원짜리 동전을 얻어냈다. 마침내 10원짜리 동전을 손에 꼭 쥐고 달려가던 구멍가게.


구멍가게에 가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구멍가게 아저씨가 칭찬 천사였기 때문이다. 그 칭찬 천사는 어렸을 적 우리 집에선 못난이로 통했던 내게 유일하게 예쁘다고 말해주었다.

그 아저씨는 내가 가면 꼭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아유, 눈이 왕방울만 하네. 참 예쁘구나." 하셨다. 이는 누구에게나 꼭 하나는 있는, 외모의 장점을 극대화하신 것. 당시 눈만 커다랗고 주근깨가 가득한 데다가 납작하고 들린 코에 이마가 툭 튀어나온, 전형적인 짱구였던 나. 그 이전까지 한 번도 예쁘다는 말을 못 들었던 나에게 성심껏 예쁘다고 칭찬해 주던 아저씨. 그 칭찬은 또 그 가게의 사탕 냄새와 섞여서 나를 홀렸다.


구멍가게에는 겨울 냄새도 있었다. 요즘에는 편의점이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예전엔 구멍가게마다 호빵용 찜통을 가지고 있었다. 찐빵 통에서 모락모락 피워 올리는 호빵의 김 냄새는 추운 겨울 마을 공기를 두루 덥혔다.


골목길 냄새도 있다. 어릴 적 마을마다 신작로 안에 큰길, 또 그 길 안에 좁디좁은 골목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 골목길은 돌과 흙냄새를 품고 있었다. 날마다 골목길을 내달리는 아이들의 신발 뒤축에선 흙먼지가 피어올랐고, 냄새만으로 평온한 일상을 풍겨내곤 했다. 하지만 진짜는 비가 올 때였다.


특히 가랑비가 보슬보슬 내릴 땐 흙냄새가 더욱 진하게 났다. 빗방울이 땅에 떨어질 때마다 흙 몇 알이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튀어 올랐다. 그 냄새가 수줍게 내려오면서 주춤거리던, 비릿한 비 냄새에 한데 섞였다.


할머니 냄새도 있었다. 할머니들에게선 특유의 구수한 냄새가 났다. 할머니 집에서 띄우는 메주나 집에 저장하는 곡식 냄새가 주된 이유였다. 주로 음식 냄새와 관련이 있다. 어린 시절 하면 떠오르는 냄새는 이렇듯 주로 자연이나 사람, 단것에 관한 것들이다. 어른이 되면서 달라져갔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기계적이고 불건강한 냄새들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며칠 전 은행에 갔다가 쓰러질 뻔했다. 은행 창구에 서서 상담을 하던 중 갑자기 어지럼증으로 비틀거린 것. 은행 직원이 왜 그러시냐고 했을 때 나는 상담 테이블 위에 덮인 비닐 덮개 냄새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은행 전체가 술렁거렸다. 지점장이 나와서 은행 창문을 전부 열고 환기를 지시하기까지 했다. 비닐 덮개를 최근에 구입했는데, 새것 특유의 플라스틱 냄새가 심하게 난 것이다. 냄새에 민감한 나 때문에 괜히 미안했다.


생각해보니 요즘 내가 고통받는 것 중 대다수가 냄새로 인한 것들이다. 차멀미도 무척 심한데 차 연료 냄새 때문이다. 또한 새집에 놀러 가면 특유의 화학 냄새 때문에 괴롭다. 남의 집에 집들이를 가서 얼굴을 찡그리는 게 미안해서 괜찮은 척한다. 집주인은 자기 집 인테리어가 얼마나 세련되고 편리한지 자랑하는 눈치지만, 나는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건강을 위해 먹는 약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캡슐로 되어있는 먹는 약도 화학물질 같은 냄새에 역겹다. 이걸 먹고 건강해질지 의문이 들 정도. 머리 감을 때는 샴푸 냄새 때문에, 세탁기 돌릴 때는 세제 냄새 때문에, 설거지할 때는 주방세제 냄새 때문에 힘들다. 결국 마스크를 끼고 일을 할 때도 있다.


또 새로 산 옷에서 나는 냄새도 괴롭다. 대부분 화학처리를 해서 나오니 아무리 천연섬유라 해도 화학 냄새가 난다. 어쩔 수 없이 새 옷도 빨아 입는다. 결국 진정한 의미의 새 옷을 입어 본 적이 없다.

자연적인 냄새는 괜찮은데 유독 석유 계 제품 냄새에만 그렇다. 하루빨리 시골로 가고 싶은 이유다.


'기생충'이라는 영화가 국제적으로 호평을 받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심화되는 빈부격차 문제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도 냄새를 말한다. 가난한 자에게는 가난한 냄새가 난다고. 예부터 가난과 사랑은 숨길수 없다고 말한다. 가난을 느끼는 것과 사랑하는 행위는 동물적인 영역에 해당하기 때문일까?(그러고 보니 기생충에서 가장 불편한 장면인 소파 신은 그 둘을 극명히 대조시킨다.)


갑자기 궁금해진다. 지금 나를 둘러싼 것들이 나에게, 혹은 남에게 어떤 냄새로 기억될까? 혹 가난한 냄새여도 어쩔 수 없다. 딱 하나 바라는 게 있기는 하다. 그렇더라도 반드시 행복한 냄새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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