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윤숙 Feb 20. 2020

해도 해도 안 되는 일들

차라리 달을 따는 게 쉽지.

어릴 적 읽은 동화다. 달을 좋아하던 공주는 어느 날 왕에게 달을 따 달라고 한다. 이에 외동딸인 공주를 귀여워하는 왕은 신하들에게 시켜서 달을 따오라고 명령한다. 전국의 천문학자와 지질학자들이 모두 모여 의논하지만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러자 공주가 밥을 안 먹고 시름시름 앓는다. 이때 한 신하가 기지를 발휘하여 달 모양의 금목걸이를 만들어 준다는 내용이다.


나는 그 공주보다 철이 일찍 들었나 보다. 밤하늘을 쳐다보며 달을 좋아하긴 했지만 아빠한테 그 달을 따달라고 떼를 쓸 생각조차 안 했으니.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니 쓸데없이 시간낭비, 인력 낭비하지 말자는 것.


하지만 약간 비슷한 일을 꿈꾸기도 한다.






새해가 시작된 지 한참 되었다. 하지만 새 다이어리 앞부분은 쉴 새 없이 내 손맛을 느끼고 있다. 올해엔 무얼 계획할까? 무얼 바꿀까? 결국 도돌이표가 되어버리긴 하지만. 그래도 시도해본다는 게 어딘가?


이런 일들은 '해도 해도 안 되는 일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여기 '해도 해도'에는 비밀이 숨어 있다.

즉 그 정도로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포기하지 못하고 계속 시도할 만큼 절체절명의 중요한 사안이라는. 주로 건강과 관련된 것이나 돈과 관련된 것들이다.


이렇게 '중요한 도돌이표'의 으뜸왕은 아마 다이어트일 것이다. 내 나이쯤 되면 이제 다이어트라는 말보다 '식이 처치법'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달까? 이제는 적어도 '옷빨'을 위해서가 아니라 '숫자' 때문에 한다. 콜레스테롤, 고혈압, 체질량, 골밀도 등등을 나타내는 의료용 숫자들.


어제 낮에 친구 셋이서 하는 단체 카톡방이 울렸다. 한 친구가 갑자기 보낸 무시무시한 말,

"오늘부터 만보씩 걸어라. 다들 인증숏 보내도록. 한 달간 운영해보고 수위를 점차 올릴 것임."


지난 주말 셋이서 1박 2일로 여행을 갔다 왔다. 그때 내 몸상태를 걱정하던 친구가 우정 어린 결단을 내린 모양이다.(우정의 힘은 위대하다.)


그 후로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다. 만보를 채울 걱정에.

아주 먼 조상님을 탓하기도 했다. 왜 우리 여자 조상님들은 동굴에만 있었을까? 남자들처럼 채집이나 사냥하러 다니지 않고. 아니 동굴 안에만 있었던 건 아이들 때문이라고 치자. 그러면 적어도 맨손체조라도 했을 것이지.

그랬다면 내가 지금 이렇게 꼼짝 않고 가만히 누워있는 걸 좋아하는 체질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라면서 투덜투덜거렸다.


어찌어찌해서 동네 한 바퀴를 돌고 만보를 채웠다. 집에 들어가서 확인해보니 친구들은 이미 인증을 마친 상태였다. 속으로 조용히 외친다. '독한 것들!'


다들 첫날부터 무사히 만보를 끝낸 것을 자축했다. 특히 제일 가능성이 없던 내가 해낸 것을 두고 격려성 말들이 돌았다. 특별히 체력이 점점 약해지고 점점 둥글어지는 몸매에 대해 우정 어린 염려로. 지난 해만 해도 나더러 하나도 안 쪘다고 말해주던 착한(?) 친구들이 어느새 변절한 거다. 급 오기가 생겼다.

"두고 봐. 내가 올해 안에 10킬로그램 뺀다."

이에 대해 다들 오구오구 분위기.

"그래. 꼭 지키길."


오랜만에 두 주먹을 불끈 쥔다.

'내가 내가 빼고야 만다. 나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슬그머니 치고 올라오는 생각,

'차라리 달을 따는 게 쉬운 건 아닐까?'


동화 속 주인공처럼 내가 실제로 공주였다면 달을 따 달라고 하지 않았을까? 혹시 모른다. 내가 철이 일찍 든 게 아니라 신분이 낮아서 아예 꿈꾸지 않았던 것인지. 그리고 이제는 달을 정복한 우리가 아닌가? 공주가 말한 게 지금 와서 보면 전혀 불가능하지만은 않았던 거다. 동화 속 꿈이 현실로 되는 일이 어디 한둘이던가?


그렇다면... 누가 알겠는가?  꿈이, '오늘 당장, 만보채우기!'로부터 실현될 수 있을지.



작가의 이전글 영화 '기생충'의 골든 글로브 수상을 축하하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