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속도에 지칠 땐 설렘이 그립다.

by 허윤숙

카 톡 등 메시지를 안 봐서 욕먹을 때가 많다. 핑계가 궁색하다. 샤워 중이었다, 잠을 잤다, 영화를 봤다 라며. 실제로 그런 적도 많은데 믿어주질 않는다. 그런 불신을 해결하기 위해 방수 핸드폰까지 나오나 보다. 어젠 중량이 있는 운동기구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낯선 전화가 왔다. 또 안 받는다고 화내는 사람이 있을까 봐 얼른 받았는데 스팸전화였다.


당장 받지 않으면 큰일 나는 전화가 얼마나 될까. 대부분 그렇지 않다. 너무 빠른 세상에서 괜히 효율성면만 앞세우는 것 같다. 효율성 말고도 훨씬 중요한 게 많은데. 어린 시절엔 안방에 있는 전화기 앞에 온종일 앉아 있어야 전화를 받을 수 있었다. 좀 더 오래전엔 편지가 그 자릴 대신했다. 일주일이나 걸려서 편지를 보내고, 다시 일주일 걸려 답장을 받곤 했다.


'기다림'은 일상이었다. 기다림에는 '설렘'이 따랐다. 내 손까지 오는 동안 편지가 어떤 내용일지, 혹시 오다가 분실되는 건 아닌지 전전긍긍했다.


친구들과 벽화로 유명한 동네에 놀러 간 적이 있다. 산비탈에 줄줄이 지어진 집들. 가파른 경사면 축대나 집 담장에는 알록달록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가끔 텔레비전에 나오던 예쁜 동네다. 이 그림 말고도 눈길을 끈 게 있다. 요즘은 발음조차 생소한, '골목'이다. 그 당시 사람들은 키가 작아서 그랬나. 집도 골목도 미니 사이즈다. 우리가 거인처럼 보일 정도다.


올망졸망한 집들을 거미줄처럼 연결한 앙증맞은 길들. 그 길을 골목이라 불렀다. 이렇게 좁은 골목에 큰 가구는 어떻게 들어갈까 싶다. 그랜드 피아노 같은 건 생각조차 말아야 한다. 하긴 그 시절 그랜트 피아노를 일반 가정집에서 구경할 일은 없었을 테니. 안전에도 취약하다. 만약 집에 불이 나면 어떻게 될까? 소방차가 들어설 공간이 없다.


아주 어릴 적 우리 집에 불이 난 적이 있다. 당시엔 불이 나면 119로 전화를 걸어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다. 하긴 119에 전화를 하고 싶어도 집에 전화기들이 없었다. 그럼 어디에다 연락을 하느냐. 누군가 "불이야" 하고 크게 외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알았는지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불이라도 나는 날은 온 동네 소집일이었다. 그땐 불이 자주 나기도 했다. 난방은 연탄을 때고, 석유곤로에 밥을 해 먹었으니. 그 석유곤로는 팔각 성냥불로 불을 붙였다.


이래저래 불을 가까이하는 생활구조였다. 자주 일어나는 화재라 단련이 된 셈이다. 불구경을 재미있는 관람처럼 여기기도. 불구경하고 온 사람들이 무용담처럼 자랑삼아 말하고 다닐 정도였다. 불이 나면 이렇게 불구경하는 사람과 불을 끄기 위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따스한 장면이 지금도 아른거린다. 불이 나면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가까운 사람 순서대로 양동이 하나씩 가져왔다. 양동이가 없으면 세수 대야나 플라스틱 바가지라도. 거기에 물을 떠 와서 불이 난 곳에 물을 부었다. 너무 좁은 골목에 있는 집은 줄지어 서서 차례차례 물을 옮기기도 했다. 그렇게 땀을 흘리며 열심히 물을 퍼 나르던 결과 불을 끌 수 있었다. 소방차 한대 없이, 절절한 마음이 모여서 불을 껐다.


이런 '따뜻함'이 골목이 품고 있는 돌멩이 하나, 바닥의 흙 알갱이 하나에 차곡차곡 물들어 있었다. 또 하나가 골목에 물들어 있었다. ‘기다림'이다. 당시엔 집집마다 퇴근하는 아빠를 마중 나가는 광경이 흔했다. 우리 집도 아빠가 퇴근하실 때마다 골목으로 마중 나가곤 했다. 무뚝뚝하던 다른 집 아빠들과 달리 우리 아빠는 무척 가정적이셨다. 특별히 우리 자매들이 아빠를 기다리는 이유가 있었다. 퇴근하는 아빠 손에 항상 과자나 과일 등이 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과자를 유난히 좋아하던 나는 가장 먼저 나가서 기다리곤 했다.


골목 흙바닥에 빗겨 저녁놀이 불그스름하게 비칠 땐, 단발머리 어린 소녀의 머리도 함께 비추곤 했다. 소녀는 거친 담벼락을 작은 손으로 꼭 잡고 골목 안을 빼꼼히 쳐다보았다. '뚜벅뚜벅' 마침내 기다리던 아빠가 골목 어귀에 모습을 드러낼 때면 "아빠"하고 소리치며 달려가곤 했다.


그 소리는 눈을 감고 골목 모퉁이에 서있기만 해도 들을 수 있었다. 많은 소리 중에서도 나는 특별히 우리 아빠 구두 소리를 맞출 수 있었다. 아빠가 걸을 때는 뒤축부터 '뚜욱뚝' 딛는 특이한 소리가 났다. 지금도 그 소릴 들으면 맞출 수 있을 것 같다. 또 지금쯤 어느 골목을 돌았는지 안 보고도 알 수 있었다. 항상 내가 예상한 시점에 딱 맞춰 아빠가 나타났다.


겨우 손바닥만 한 집들을 얼기설기 엮어주던 골목들. 지금 보면 답답하고 고만고만해 보일 수 있는 그림이다. 하지만 골목의 모습은 집집마다, 또 아침저녁으로 다른 풍경을 만들어냈다. 한낮의 짧던 그림자가 비스듬히 누울 때쯤, 놀던 아이들은 하나둘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때마다 덩그러니 서있던 골목들.


골목들은 그렇게나 많은 사람을 품었다가 토해내곤 했다. 그러는 동안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준 골목. 골목은 많은 걸 해냈다. 낮에는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노는 놀이터로, 저녁엔 가장을 기다리는 대합실로, 저녁이 되면 연인들의 세레나데 무대로, 할 일없는 백수에겐 벽화(낙서) 캔버스로. 여러모로 쓸모가 많다는 건 꽤나 고마운 일이다.


어릴 적 동네에 찾아가 본 적이 있다. 슬프게도 내가 너무 늦었나 보다. 그 땅, 그 자리는 맞는데, 그 많던 '골목길'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분명 이 자리가 맞는데. 초등학교 위치가 그대로인 걸 보면. 학교 정문을 지나 언덕을 내려가면 분명 앞에 시장 골목이 보였고, 그 오른쪽에 문구점, 또 넓은 언덕 빼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 언덕을 지나면 우리 집을 지름길로 갈 수 있었는데. 다들 어디로 간 거지? 다 사라지고 학교만 그대로인걸.”


그 대신 나지막한 목소리가 빙빙 돌아 나온다.

"주근깨 꼬마 아가씨. 진짜 오랜만이야. 몰라보게 훌쩍 컸군. 왜 이리 늦었어? 많이 기다렸잖아. 얼마나 보고 싶던지. 참으로 그렇더군. 어느 날부터 하나둘 정겹던 얼굴들이 내 곁을 떠나지 뭐야. 코흘리개 희철이 걘 요즘 코 안 흘리나 몰라. 또 맞다. 그 뭐더라, 맨날 질질 짜던 갈래 머리 땋고 다니던, 그래, 영숙이. 그 아인 한번 온 적이 있었어. 얼마나 반가웠던지. 그 아인 아주 보기 좋게 살이 붙었지 뭐야. 어릴 적엔 그렇게 빼빼하더니.


이렇게 지나고 보니 그때가 그리워. 그땐 온종일 몸살이 나곤 했지. 아이들이 오죽 드세야지. 말뚝 박기 하면 동네가 떠나가라고 쿵쿵거리고 소리 지르고. 허구 헌 날 내 귀청이 남아나질 않았지. 고무줄놀이는 또 어떻고. 콩 줄기 같은 다리들은 어찌 그리들 재 되던 지. 나를 하루 종일 밟고 또 밟았지.


그런데 말이야. 난 그때가 참 좋았어. 그땐 말이야. 저녁에 잠깐 외로운 것 빼곤 늘 북적댔거든. 지금은 그냥 그래. 전보다 내 몸집이 훨씬 커지고 세련되긴 하지. 시시때때로 잘 씻겨주고 입혀주고 말이야. 그런데도 뭔지 모를 허전함이 있어. 나는 아이들을 좋아하는데 말이야. 요즘 아이들은 내 앞에 잘 안 보이더군. 무엇보다 말이야. 요즘 아이들은 시끌벅적하게 놀지를 않아. 그땐 참 시끄럽고 귀찮았는데, 뭐든 지나고 보면 좋은 법인가 봐.”


골목이 있던 자리엔 함부로 성큼성큼 들어선 고층 아파트들이 있다. 우리의 소중한 골목들을 밀어내 버리고. 그 많던 이야기들을 그러안은 채 말이다. 이제 우리도 그래야 하나. 그 귀한 것들을 고이 가슴에 안고 살아야 하나. 그렇다 쳐도 준비할 시간이 없었던 게 아쉽다.


친구에게서 카 톡이 울린다. 코로나 시국인데 잘 지내냐는 안부다. 지금 답변 안 하면 또 욕먹을까? 아니다. 지금 답변하지 않겠다. 나는 ’ 골목 형 인간‘이니까. 어차피 우리에겐 많은 시간이 있다. 내 가슴에 안겨있는 골목처럼. 친구에겐 나중에 말해야겠다. "내가 왜 곧바로 답변을 안 했냐면, 그건 말이야. 일부러 그랬어. 그러면 내 답변을 기다리는 동안 네가 나를 더 많이 생각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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