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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Mar 24. 2020

어차피 왜곡되는 게 기억이라면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읽고

내 두 번째 책을 보고 나서 친한 친구가 말했다.

"너, 책에다 그렇게 거짓말을 하면 어떡하니? 뭐라고? 네가 대학 다닐 때 남자들한테 차이기만 했다고?"

"안 그랬나?"

그러자, 친구가 근거를 들어가면서 반박을 해 주었다.

친구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문제는 '몇 장면의 부풀림'에 있었다. 몇 번의 '차임'이 내게 더없이 컸으니까. 물론 나 좋다고 한 남학생도 있었다. 그런데 별로인 사람이 좋다고 한 건 기억에서 지워진 것이다.




 


'젊은 시절'이라는 단어만 떠올리면 머릿속에서 '삐-' 소리가 난다. 뭘 떠올려도 '없는, 창피한, 설익은 것'들이 먼지와 뒤범벅되어 바닥에 뒹굴거리기 때문. 그렇게 찌질했던 젊음을 책에다 썼다. 그런데 꼭 그렇지만은 않았는지도...


이런 내게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라는 책에서 줄리언 반스는  '기억 방식'에 대해 말한다. 우리가 불행이라고 느끼는 것들이 고작 '과거에 대한 개인의 평가'에 불과한지도 모른다는 것. 그 평가가 '아주 나쁨'으로 기억된다면 불행한 사람, 또 '매우 좋음'이라면 그땐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성적표만 좋으면 공부를 잘한 것이 되는 이치와 같다. 학교에서 공부를 안 하고 놀던 학생이 낙제 성적표를 받는다. 그런데 이 성적표를 집에 가지고 가면 혼날까 봐 성적을 조작한다.


이 책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맨 부커상을 받았다. 그러나 상 받은 책 답지 않게 분량이 고작 150페이지로 짧고, 쉽게 읽힌다. 하지만 이 책은 작가가 말했듯이, 다 읽고 나면 처음부터 다시 읽게 되기 때문에 300페이지짜리다.


과연 나도 이 책을 다 읽고 나자마자 앞으로 돌아가 다시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땐 주인공 토니가 흙수저로 태어나 자존감이 낮구나 했다. 그래서 첫사랑도, 결혼도 실패하고, 그러나 덤덤하게 인생을 관조하는구나 다. 성격은 부인이 바람을 피워도 원망하지 않는 착한 남자.


그러나 마지막을 읽고 나서는 모든 것이 의심스러워졌다. 토니가 베로니카에게 차인 게 맞나? 혹시 토니의 어떤 태도가 베로니카로 하여금 자길 싫어한다고 느낀 게 아닐까? 또 전 부인인 마거릿이 바람을 피웠다지만 토니에게 잘못은 없었나?


노년이 된 토니의 기억을 믿을 수가 없다. 하지만 궁금하다.

토니의 기억 중 과연 어떤 걸 왜곡이라 부를 수 있을까? 어쩌면 모든 기억(역사)은 책 속에서 말하듯,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가까운 듯'하다.


내게 위안이 되는 지점은 이것이다. 누구도 한 사람의 인생을 판단할 수 없다는 점. 별만큼 많은 사람들, 또 그만큼 많은 인생들. 그 인생은 모두 각자 스토리가 있고, 그 스토리는 각각 정의 내리기 어려운 예술성과 독창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이 소설이 막장드라마처럼 무 자르듯이 쓰였다면 달랐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모든 게 석연치 않다. 진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드리안이 왜 자살했는지. 1인칭 시점의 소설답게 우리는 주인공의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과거는 어쨌거나 누군가의 기억 방식 속에서만 존재한다. 여기에 강력한 것이 첨가되는데 바로 어쭙잖은 '상상력'이다.


어릴 적 남진이라는 가수를 좋아했다. 하루는 친구가 그 가수가 주연으로 나온 영화를 보고 와서 자랑을 했다. 그때 그 내용이 현실에서 본 것으로 저장되었나 보다. 몇 년 뒤 그 친구에게 그 영화 장면을 이야기하니, 그 친구가 하는 말이 나는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발끈해서 그 영화를 봤다고 우겼다. 나중에 알아보니 어린 시절 그 누구도 나를 영화관에 데려간 적이 없었던 것.


우리는 종종 사실을, 자기가 중점을 두는 방식대로 저장한다. 그 사실을 수시로 재생하는데, 금세 너덜너덜해진다.


책 속에서 토니는 독백한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다만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후략-'


나이가 들면서 기억 저장소에는 용량 초과 버튼이 자주 울린다. 그래서 전략적으로 저장을 한다. 고통스럽거나 행복한 것으로만. 토니는 자신이 피해자라고 믿었 기억이 잘못되어 있음을 깨달으며 말한다.


'노년에 이르면, 기억은 이리저리 찢기고 누덕누덕 기운 것처럼 돼 버린다. 충돌사고 현황을 기록하기 위해 비행기에 탑재하는 블랙박스와 비슷한 데가 있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면 테이프는 자체적으로 기록을 지운다. 사고가 생기면 사고가 일어난 원인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사고가 없으면 인생의 운행일지는 더욱더 불투명해진다.'


앞으로 나의 '기억'들은 어떻게 보존될까? 누덕누덕 기워나갈까? 그래도 어쩔 수 없지만, 이왕이면 퀼트 이불이 낫겠다.


기억 방식을 바꾸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다. 혹시 내가 젊은 시절 남자들에게 차인 게 아니라, 내가 너무 잘나서 그들이 떠난 건 아닐까? 지레 겁을 먹고? 뭐, 착각일 수도 있고.


하지만 어떠랴? 이런 방식이 누구에게 해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 봤자 과거일 뿐이니까. 게다가 어차피 불완전하고 못 믿을 우리의 기억력을 생각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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