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윤숙 Mar 28. 2020

누가 뭐라 하던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살았더니,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가 나에게 준 위안

책이 주는 이점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특별히 마음에 위안을 주는 경우, 두 가지가 있다. '내가 맞았구나.' 아니면 '어쩐지... 그래서 내가 힘들었구나.'

이런 면에서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라는 책은 나에게 '내가 맞았음'을 알려준 책이다.


나는 소위 '내 꿈대로 살았다. 내 가슴이 시키는 대로 살았다.'

물론 그것 때문에 불편한 면도 많다. 그런데 적어도 나는 행복하다. 남들 눈에는 아닐지라도.




지금 코로나 때문에 일어나는 전 세계적인 혼란의 한 귀퉁이를 불안이라는 화기가 불을 지피고 있다.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종종 이슈 몰이되는 가장 불편한 담론, '불황의 전조일까? 공황의 서곡일까?' 이를 두고 각계각층의 논의가 활발하다.


규모는 다르겠지만 지금과 비슷한 분위기라면 바로 12년 전 일이 떠오른다. 불량 모기지로 인한 리먼 브라더스 사태로 우리나라가 들썩거릴 당시 나는 해외에 있었다. 2008년 가을 무렵이었다. 우리 회사가 상해에 지사를 차린 지 겨우 2년이 조금 넘어서고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물량이 쏟아지는 거다. 당시 한국 설계회사들이 영세하기도 하고 사기성이 농후한 데가 많아서 우리 회사는 다른 회사와 교류 없이 홀로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일이 우리 회사로 몰리는 것이었다. 동시에 12개 공사를 진행한 적도 있다.(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회사에 물량이 쏟아진 이유는 다른 회사들이 이미 망해서 한국으로 돌아가서였다.) 문제는 결재였다.


평소 결재 잘해주기로 유명했던 국내 탑급인 대기업이 계약금도 없이 공사를 5개나 진행해달라고 한다. 공사 총금액이 7억에 달했다. 연매출이 30억 정도 하던 그 당시 우리 회사 규모로는 무리였다. 하지만 vvip 회사가 아닌가? 어쩔 수 없이 여기저기 자금을 끌어다 공사를 진행했다. 그런데 잔금까지 합쳐 총 세 단계에 걸친 결재를 한 번도 해주지 않았다. 그때 하루가 다르게 내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지고 죽을 것 같은 고통이 뒤따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 본사로부터 pf 대출이 막혔고 원달러 환율이 두배로 뛰어, 달러와 연동되어 오르내리는 위안화도 덩달아 두배로 뛴 것이다. 한국에서 대출금이 온들 두배 금액을 지불해야 하는 판이니, 중국지사에서는 환율이 안정될 때까지 결재를 미룬 것이다.


그 과정에서 영세한 을 업체들은 죽어나간다.(요즘 같은 상황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날 듯하다.) 위기가 오면 가장 아래에 있는 계층부터 피해를 감수하게 되는 것.


결국 우여곡절 끝에 한국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한국에 돌아와서 일어난, 지난 11년간을 돌이켜 보면 절로 눈물이 나온다. 사업이란 일어나는 건 힘들지만 무너지는 건 한 순간이다. 그때 한국에 돌아와 보니 주로 교사 생활을 하는 친구들은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오히려 잘 살아가고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지난날들이 후회되었다. 내가 이러려고 숱한 밤을 새우고 고민하고 고생을 한 걸까? 겨우 이러려고? 자식을 호강시켜주지도 못하고, 겨우 하루하루 연명해 나가는 생활을 하려고?


젊은 시절 내 손에는 무수히 많은 카드들이 있었다. 어느 패를 쥐느냐에 따라 내 인생은 어떤 변주곡이 나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난 하필 가장 잠이 부족하고, 가장 돈이 안 되면서 가장 성공확률이 낮은 길을 걷게 될 터였다. 이유는? 딱 하나다. 내 가슴이 시키니까.


그 가슴이 시키는 대로 살았더니 결과가 고작 이거냐? 하고 자책하고 싶었다. 나 혼자 몸이라면 모르지만 아이가 둘이나 있었다. 그 아이들이 무슨 죄냐? 어른들 말씀이 하나도 안 틀린다. 계속해서 교사 생활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야. 하면서. 우리나라에서 여자에게 이만한 직업이 어디 있나?


그러니 그렇게 잘난 척할 때부터 알아봤지. 뭐가 그렇게 잘났던 거니? 청개구리 띠라도 돼? 왜 그렇게 자길 괴롭히지 못해서 안달이야? 중국에서 사업하는 게 그렇게 만만한 줄 알았니? 미래학자들이 쓴 책을 너무 많이 읽은 거 아냐? 뭐? 중국이 떠오른다고? 미국을 앞지를 거라고? 그들이 맞을지 어떻게 아니? 그들은 그냥 학자들일뿐이잖아.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다고. 이번 꼴을 봐라. 누가 열심히 일 안 했대? 네가 수고한 거 다 알아. 하루에 잠 세 시간 이상 자본적이 없지. 상해는 중국이 아니었어. 중국어도 잘해야 하지만 영어도 많이 쓰니까. 고급스러운 고객은 다 영어로 대화를 하잖아. 그러니 새벽반 어학원을 다녔지. 새벽 5시에 일어나 예습하고 학원에 나가 영어로 중국어 강의하는 수업을 들어야 했어. 효율적으로 시간을 쓴다고 그렇게 했어. 그러니 머리에선 쥐가 났지. 영어 머리로 전환한 다음 중국어로 입력하는 일. 또다시 한국어로 번역해서 중국어로 대답하고 다시 영어로 설명하고 그 짓을 몇 년이나 했어.


육체적인 노동은 어떻고? 중국이 그렇게 넓은지 몰랐지. 공사가 그렇게 각지로 퍼져있는지도 몰랐고. 매일 몇 시간씩 이동하면서 현장을 감리했어. 상해 푸시로 출근해서 푸동 쪽으로 갔다가 소주로 갔다가 또 쿤산 갔다가. 몸은 너덜너덜해졌지.


나중엔 신체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어. 상해 여름의 40도 기온에도 땀이 나지 않는 거야. 오히려 긴팔을 입고 다니고 오한이 수시로 나고. 그런데 상해는 의료시설이 형편없었어. 그래서 누가 소개해준 도사 같은 분에게서 젓가락만 한 침을 이마에 맞고는 땀이 나기 시작했어. 그야말로 나는 당시 몸의 기가 막혔던 거래. 얼마나 기가 막히던지.


그런데 말이야. 이렇게 개고생을 했는데도 말이야. 결국 거지가 되어 한국에 돌아온 거야. 그게 말이 돼? 결국 한국에서 계속 있었으면 이러지 않았을 거 아냐? 누구 좋으라고 그런 거야?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랬던 거였어. 그래 나는 항상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한 거였어. 책을 너무 많이 읽은 게 흠이었나? 어쨌든 매사가 그랬어. 책에 나온 건 다 해보고 싶고. 열정이 이끄는 대로 끝까지 가보는 것. 늘 숨을 깊게, 크게 들이마시면서 사는 것. 절대로 쫄지 않는 거. 그게 가난을 선물해줄지 건강을 빼앗아 갈지 그따위를 미리 걱정하고 말고 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어. 그냥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을 거 같았거든.


얼마 전 친구가 집들이에 불러서 갔거든. 그런데 집이 운동장 만하고 고급 호텔 저리 가라야. 그래서 내가 기가 죽어 부러워하니 친구가 하는 말, "야. 너는 지금까지 할 짓 안 할 짓 다 했잖아. 난 아무 짓도 안 하고 하고 싶은 거 꾹꾹 눌러 담아서 겨우 이 집 하나 달랑 건진 거야."


맞는 말 같아. 나를 나보다 더 잘 아는 남편이 그랬지. 내가 교사생활을 계속할 걸 그랬다니까,

"그랬으면 지금 쯤 당신은 정신 병원에 있을걸?"


맞아. 내가 할 짓 안 할 짓 다 하고 돌아온 지금은 교사가 진짜로 좋아. 지금 코로나 때문에 집에 있다 보니 아이들이 그리워. 내가 가르칠 때 아이들 눈빛을 보면 말이야. 그땐 말이야. 내 머리 위로 별들이 총총거리는 거야. 사람 눈이 별과 담았다는 걸 처음 알았다니까.




맞는 말인 거 같아. 나는 누가 뭐래도 할 짓 안 할 짓 다 해 본거 같다. 그 결과가 뭐냐고? 꼭 결과가 있어야 하나? 죽을 때 묘비에 쓰려고? 그냥 아무렴 어때? 내가 그 별짓 다 하는 동안 누군가에게 그래도 도움이 되었으면 되지 않나? 내가 멋지게 설계하고 깔끔하게 시공한 공간들. 그리고 내가 가르친 아이들이 바로 그 증거야.


명품백, 그깟 거 없으면 어때? 대신 난 누가 뭐래도 눈치 같은 거 하나도 안 보고 살고, 또 무엇보다 말이야... 난 진짜로 행복하거든.



작가의 이전글 썰물에 드러난 것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