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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May 02. 2020

들으면 은근히 기분 나쁜 말 2

나를 위하는 말 같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은근히 기분 나쁜 말 일곱 가지를 발행하자 공감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쓰고 보니 수박 겉핥기 한 느낌이었다. 더 상처 받는 말이 많은데. 내 안에 깊숙이 박힌 상처를 쑤시는 게 겁났나 보다.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나를 치유하는 효과도  공감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또 내가 실수를 덜 하게 되리라는 희망에.


가장 큰 효과는 자기 힐링도 아니고 실수했던 사람에게도 아니다. 일부러 그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다.


오래전 미국에서 kkk단이 한창 활동할 때 일이다. 한 용감한 백인이 그 무시무시한 백인 우월주의에다 유색인종 혐오 집단에 위장 가입했다. 위험을 무릅쓴 거다. 그는 열심히 활동을 하면서 그들이 쓰는 온갖 암호와 규칙들을 모조리 배웠다. 그리고 텔레비전 드라마로 만들었다. 드라마에는 그 단체에서 쓰는 온갖 비밀스러운 암호와 행위들을 다루었다. 우스꽝스럽게. 결국 그들이 에지 있다고 착각한 비밀들을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자 kkk단이 희화화되면서 가입 회원수가 줄어들었다. 결국 그 집단의 활동이 흐지부지 되는 효과를 가져왔다.







묘하게 기분 나쁜 말들이 있다. 그런데 묘한 게 아니라, 말하는 사람들만 눈치를 못 챘던 것이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체로 알고 있는 사실을.


이는 소뇌(잔머리) 집중 발달형 인간들의 과오다. 화가 난다. 그들은 착하거나 약한 사람에게는 그 묘수가 안 보일 거라 생각했다는 것.


대단한 착각이다.


그들이 암호처럼 사용하지만, 듣는 사람은 무척 기분이 나쁜 말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네가 너무 착해서 그래"

"너무 착하다"는 말은 내가 어릴 적부터 징글징글하게 많이 들어온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그냥 착하다는 말과는 다르다.

"착하다"는 긍정적인 말이지만, "착해서 그래." 부정적이다.


물론 말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나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사람이 하면, 걱정해서 하는 말이다. 그렇더라도 주의가 필요한 말이다. 착함을 부정적으로 다루니까. 그 부정적인 단어가 나에게 사용된다는 건 아무리 걱정에서 나온 말이라도 듣기 싫다. 하물며 나를 시샘하거나 좋아하지 않는 스멜이 강하게 풍기는 사람에게서 나온 말이라면?


전업주부일 때 이야기다. 그때 우리 집에 자기 아이들을 매일 데리고 놀러 온 아기 엄마가 있었다. 그 엄마는 패션모델처럼 꾸미고 이 집 저 집 자기 아이들을 데리고 다녔다. 거기서 밥을 얻어먹고 자기 아이들을 먹이게 했다. 상대방 아기 엄마도 똑같이 아기 엄마인데. 마치 서로 친하면 뭐든 다 해주는 걸로 생각하는 듯했다.


그런데 막상 다른 엄마가 우리 집에 놀러 오면 말이 달라졌다. 오늘은 다른 엄마가 오니 오지 말라고 하면 불끈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 엄마는 왜 그렇게 자주 놀러 와요? 오면 하루 종일 있다 가고. 그럼 하루 세끼를 거기서 다 해결하는 거잖아요? 아이들까지. 자기 집엔 초대도 안 하고. 다 은수 엄마가 착해서 그래요. 좀 뭐라고 하세요."


기가 막혔다. 그 엄마가 제일 많이 놀러 왔는데. 아침나절부터 남의 집에 가서 하루 종일 얻어먹고는 자기 집엔 초대도 안 하고. 그러면 집주인은 녹초가 다. 자기 아이들 기르는 것도 힘든데 남의 집 아이들 뒤치다꺼리까지 해야 하니.


나는 당시 나이가 제일 많아서 다들 언니라고 불렀다. 그 언니라는 말이 그렇게 족쇄가 될 줄이야. 결국 죽도록 고생을 하게 되었다. 고생은 괜찮았다. 얄미운 말이 문제지.


서로 우리 집에 오는 걸 가지고 경쟁을 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니 상대방을 까야하고. 상대방이 오는 날에 자기가 못 오니 그런 말을 해서 내가 경계하도록 한 것. 그렇더라도 내가 너무 착해서, 물러서, 이용당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을 해야 하나?


다행히 요즘 나는 그 정도로까지 미련하지 않다. 하지만 착하다는 말이 이렇게 내동댕이쳐져도 되는 걸까? 생각하니 씁쓸하다.

'착해서' 그렇다니...

이는 '착함'도 모욕하고,

'착함'으로 맺은 인간관계까지 평가절하하는 다.


"아냐. 됐어."

이 말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다가 머뭇거리며 거두어들이는 경우에 하는 말이다.


첫 책을 내고 나서다. 지인이 나에게 책을 읽었다면서 조언을 해주겠단다. 처음엔 철자법 등 몇 가지를 들었다. 작가에게 조언을 해주겠다는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처녀작이 훌륭할 리도 없다. 조언이라는 말도 그렇다. 말하는 사람이 대단한 독서가나 지식인이 아닌 바에야.


게다가 그 말을 한 장본인은 책과 상관없는 직업을 가졌다. 직업 비하는 아니지만 장르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대뜸 내 책을 조목조목 비판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칭찬 비슷하게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짐짓 점잖은 체를 하면서 "아냐. 됐어." 그러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뭐가 됐냐고 하니,

"아냐. 아냐. 됐어. 다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아.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나을 거 같다."

어안이 벙벙했다. 전화상으로 내 반응이 삐진 것 같아서 그랬나?

비판 내용도 참 빈약했다. 내가 보기엔 적어도 고등학교 졸업 후 책을 한 권도 안 읽은 티가 나 보였기 때문이다.


가장 큰 지적은, 내 책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어떤 문제냐니까, 버벅대면서,

"아냐. 됐어." 하는 것이다.

'됐다니. 됐다니...'


이는 세상에서 가장 듣기 거북한 말이다. 본인은 나를 생각해서 한 말 같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일 뿐이다.

한번 내뱉은 말은 끝을 맺는 게 좋다. 이렇게 얼버무리면 더 상처가 되기에.


지금까지도 그 상처가 남아있다. 책을 내는 일이 두렵기까지 하다.


"이런 말 하면 기분 나쁘겠지만."

기분이 안 나쁠 일도 이 말을 듣음으로써 기분이 나빠진다. 말 내용은 이미 중요하지 않다. 알고 한 말이기 때문. 결국 이 말을 하는 사람의 속마음은 이렇다.

'난 네가 기분이 나쁠 걸 다 알아. 하지만 어쩔 수가 없어. 넌 들어야 하니까. 왜냐고? 그건 내 말이 곧 진리니까.'


마치 종교집단에서,

'무조건 믿어야 한다. 네가 죄인인 것을. 물론 믿어지지 않겠지만.'

라고 윽박지를 때와 같다.  

'믿지 못하는 건 네 믿음이 부족해서 그래.' 하면서.


이 말에는 상대방을 개조하려는 강한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 이런 생각은 위험하기까지 하다.

'넌 내 말을 무조건 믿어야 해. 내 충고를 다 받아들여서 개선해 보도록. 안 그러면 너만 손해야. 알겠니? 뭐 현실을 인정하고 싶진 않겠지만.'


상대방에 대한 존중감이 있다면 당연히 기분 나쁠 말은 안 하는 게 낫다.

직장생활에서 상대방을 가르치려 들 때 많이 하는 실수가 아닌가 한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심한 찔림으로 내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다.



"원래 다 그래."

이 말은 나도 몇 번 실수한 것 같다. 그것도 내가 아낀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하지만 아끼는 것에는 존중이 뒤 따라야 한다. 부모 자식 간에도 예외가 없다. 엄마는 자식을 사랑한다. 그러나 존중까지는 아닌 경우가 흔하다. 아이들은 그걸 정확히 꼬집는다.


부모가 자식을 자기 소유물처럼 여긴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소유물은 아끼긴 하지만 존중하지는 않으므로.

존중하지 않음에 대한 결과는 말투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내가 흔히 하는 실수 중 아이가 힘들어할 때마다 충고랍시고 하는 말이 있다.

"너 땐 다 그래."

이처럼 위험한 말이 없다.

아이마다 다 다르고 내 때랑도 다른데.

어떻게 일반화시켜서 말을 할 수가.


우리 딸이 처음엔 엄마에게 실망해서 괴로워했다.

그런데 남동생이 똑같이 당하는 걸 보니 참을 수가 없었나 보다.


하루는 아들이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고 있었다. 그때 내가 단칼에,

"그걸 가지고 뭘 그래. 엄마 땐 그 정도는 고민도 아니었는데. 요즘 애들이 너무 편해서 그래. 그리고 네 나이땐 다 그래."

나는 아들이 마치 눈 앞에 있는 쓴 약을 어떻게 먹을지 고민하는 것처럼 다루었다. 그래서 별로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는 말을 해 준 것이다. 나는 물타기를 한 거고 그러면 아들이,

'아. 그렇구나. 별거 아니었구나.' 하면서 그 약을 쉽게 넘길 줄 알았던 것.


그걸 옆에서 듣다 못한 우리 딸이 하는 말,

"엄만 그게 문제야. 원래 다 그런 건 없어. 나도 엄마한테 고민을 털어놓으면, 엄마가 네 나이땐 무조건 다 그래 하니까 맥이 빠져서 더 이상 말하기 싫었거든. 일단 고민을 제대로 공감해줘야지."


듣고 보니 뜨끔하다. 나도 학창 시절 그랬던 것이다. 어른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 화가 났던 적이 많다. 특히 선생님들이 하시는 말씀들.

"우리 땐 단체로 엎드려뻗쳐하고 기합 받는 게 일상이었다. 손바닥 맞는 건 애교 수준이지."

그때 속으로 했던 말이 이거였다.

'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죠. 선생님.'

그런데 지금 내가 똑같은 과오를 저지르고 있다.

그때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인 건가?


그때의 나나 지금의 내가 같은 사람이라면 똑같은 기준으로 대해주어야 했는데..

청소년 시기의 나를 대하는 방식과 지금 청소년인 우리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을.


그런데 꼰대처럼,

"뭘 그딴 거 갖고 고민하니? "하는 공감능력 제로의 말을 한 것이다.




처음엔 내 상처를 보듬으려고 시작한 글이었다. 그런데 써 내려갈수록 자꾸 내가 남에게 준 상처가 떠오른다. 말이 이렇게 무서운 거였다. 내 상처를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남의 상처가 눈에 들어오니...

그렇다.


남도 나도 느끼는 건
다 똑같은 거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난 항상
내 상처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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