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보약

듣자마자 영혼이 치유되는 말

by 허윤숙

세종대왕은 위대하다.






중국에 살 때 일이다. 그때 집에서 가사를 도와주시는 조선족 아주머니나 회사에 근무하는 조선족 직원들의 말투에 의문을 품은 적이 있다. 한족은 우리랑 다른 언어를 쓰니 그렇다 쳐도, 조선족은 우리랑 같은 한국어를 쓰는데 왜 다르게 느껴지는 걸까? 하고.


우선 성조의 차이가 있다. 중국에는 말을 할 때 음의 높낮이가 네 가지로 나뉜다. 같은 단어라도 높이에 따라 전혀 다른 말이 되곤 했다. 그 성조에 익숙한 조선족들은 우리말을 사용할 때도 성조를 적용해서 말했다.


성조 다음으로는 어미에 따른 차이가 있다.

'안다'는 말을 중국식으로 표현해야 하는 조선족들은 무심하게, "알아요." 하면 끝이다.


나는 그 말에 혼자 가슴을 쓸어내리곤 했다.

아침마다 출근하면서 아주머니에게 당부하곤 했다.

아이들 간식은 무엇을 주고, 몇 시에 데리러 가시라고 말씀드리면 그냥 딱 한마디로,

"알아요." 한다.

그러면 나는 속으로,

'오늘 아주머니가 기분이 안 좋으신가?'

했다. 우린,

"네. 알겠어요." 내지는

"알고 있어요."

등등 뉘앙스를 드러내는데 말이다.


군더더기 없이 말하는 그들의 언어습관에는 한자가 한몫할 듯하다.

중국에서 살 때 놀랐던 일이 하나 있다. 중국은 문맹률이 무척 높다는 것.

쉬운 한글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낯선 광경이었다. 자기 나라 글자를 모르다니.

심지어 자기 이름을 못 쓰는 공인들이 수두룩했다. 그래서 인건비를 지급할 때 애를 먹곤 했다.


그럴만했다. 아무리 학식이 높더라도 평생 한자를 다 못 배우고 죽는다고 하니. 그들은 한자수가 총 몇 자 인지도 몰랐다. 그들은 대략 5,000자를 알면 생활에 불편이 없다는 말을 했는데, 그 정도도 서민들에겐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한자는 뜻글자라 표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한글은 소리글자라 어떤 음이라도 표기할 수 있다.

표기의 자유로움은 다양한 표현을 가능하게 한다. 외국인이 한글을 어려워하는 이유다.

같은 동사나 형용사라도 어미가 무한대로 변주되곤 하니.


우리가 무심코 쓰는 말에는 우리 감정이 담긴다. 그 감정을 글자로 읽고 나면 그 감정이 더욱 발전된다. 이렇게 말로 내뱉음으로써 감정을 마음껏 표현하고 주고받을 수 있는 한글이 새삼 고맙다.


그 섬세한 변주를 남을 위로하는 데 쓰는 사람이 있다.

이때 그들이 하는 말 한마디는 보약 한 사발과 같은 효과가 있다.


시름시름 앓던 사람에게 기운이 번쩍 나게 하는 십전대보탕 말에는 뭐가 있을까?


"그 마음 나도 알아."

화가 날 일이 있어서 씩씩 거리다가도 이 말을 듣는 순간 다리에 힘이 스르르 풀린다. 나만 억울한 거 같고 나만 이해받지 못한 것 같을 때, 나를 100% 이해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적어도 외롭지는 않을 것 같다.


전에 억울한 일을 당한 적이 있다. 억울함도 억울함이지만 아무도 내 입장을 이해하지 못할 상황이라는 게 미칠 지경이었다. 상대방이 워낙 완전범죄를 기획하였기에.


그래서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했지만 제대로 항변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때 팅커벨처럼 사뿐히 내 어깨에 날아와 준 말이 이 말이었다. 이 말에는 내 상황을 이해한다는 말과, 내가 씩씩대는 것이 합당하다는 암시가 들어 있다. 게다가 그 완전 범죄자가 나빴다는 식의 용감한 편들기까지.


이 말을 듣고 나면 이해받은(사랑받은) 나는 이내 잠잠해진다. 날 이해해 주는 사람이 한 사람만 있어도 괜찮았나 보다.

'적어도 나랑 한편이 한 명은 있어. 못된 너만 외톨이지.' 하는 어리광과 함께.


"넌 진짜 잘 될 거야."

20대 시절 교사를 그만두고는 이리저리 방황할 때였다. 그때마다 친구가 하는 말이 힘이 되어주었다. 원하던 시험에 떨어지고 좌절할 때마다 이 한마디가 그렇게 듣기 좋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미심쩍어하는 내게 꼭 덧붙였다.

"내가 사람을 잘 보거든. 내가 잘된다고 한 사람은 꼭 잘되더라고."


"그렇구나."

이 말은 어떤 말에 써도 다 해당이 된다. 상대방이 말을 끊임없이 이어갈 때 딱히 중간에 끼어들 말은 없지만 응수는 해야 할 때 특히 유용하다.

적당한 추임새 역할을 하면서 상대방에게 열중하는 느낌을 주니.

이 말을 할 땐 성의 있는 눈빛이 중요하다. 만약 영혼 없이 "그렇구나." 하면 오히려 상처를 받는다.

하지만 진심을 담아 따뜻한 눈빛으로 천천히 말하면 그 자체로 힐링이 된다.


"넌 할 만큼 했어."

이 말은 상대방이 자신의 과오나 상실감에 괴로워할 때 크게 위로가 된다. 특히 애매한 죄책감에 시달릴 때. 상황에 지배당할 때 우린 자신을 자책하곤 한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가 나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중요한 시험이나 병간호 등.


자신은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수를 다 썼다. 하지만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마음조차 가슴에 걸려 있는 경우 이 말 한마디는 묵은 체증을 내려가게 해 준다. 이 말은 꼭 내가 아니라, 남이 들려줘야 효력이 있다.

무엇보다 내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친한 사이인 경우, 이 말을 해 줌으로써 괴로움을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다.


"네 말이 맞아."

이 말을 할 때는 분위기가 중요하다. 주로 나이가 더 많은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맞장구쳐주고 격려해 줄 때 유용하다.


이는 또 내가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많이 쓰는 말이기도 하다. 아이들끼리 싸울 때 보면 사소한 시비로 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사소하다고 해서 뭐 그런 걸 가지고 화를 내냐고 하면 아이 입장에선 더 화가 난다. 각자 자기만의 예민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므로.


그때는 상대방의 싸움 논리를 다 들어주고 이해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논리의 맞고 틀림은 중요하지 않다. 화가 나게 한 것 자체가 잘 못 한 것이므로. 그러니 무조건 네 말이 맞다고 인정해주면 감정에 여유공간이 생긴다. 그렇게 만든 여유공간에다 논리적으로 다시 설명해주면 된다.


"그동안 너 진짜 힘들었겠다."

중국에서 하던 사업이 힘들어서 한국에 온 지 11년이 지났다. 그 후로 지옥 같은 시간들을 견뎌내곤 했다. 그 시간 동안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에게 연락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번듯하게 성공해서 오리라는 다짐과 함께 떠난 것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그 모습을 보는 사람도 가슴이 아플 거라는 생각에. 어쩌다 연락이 되었던 친구 외에는 연락을 끊고 지냈다. 그런데 하루는 중학교 때부터 친했던 단짝 친구에게서 학교로 전화가 왔다.


그 친구는 우연히 네이버에 이름을 쳐 봤고 책 이름과 함께 내 이름이 뜨더란다. 그래서 유튜브에도 가보니 내가 올린 영상에 학생들 댓글이 있었다. 그 댓글에 친절히 학교 이름을 밝힌 학생이 있었는데 그걸 보고 전화한 것이다.


14년 만에 감격스러운 상봉이 이루어졌다. 그동안 왜 연락을 안했냐는 친구 질문에 울컥했던 나.

그런데 내 말을 계속 듣던 친구가 한 숨을 푹 내 쉬면서 말했다.

"너, 진짜 힘들었겠다."

따뜻한 눈빛과 함께 해준 그 말은 내 안의 깊숙한 샘을 터트려 주었다.


그리고 그 샘물은 나를 치유해주었다.

이내 나는 씩씩하게 말했다.

"아냐. 이제 하나도 안 힘들어."






홍삼이나 십전대보탕은 비싸다. 귀하고 몸에 좋은 약이니.

하지만 돈이 한 푼도 들지 않으며, 나도 덩달아서 같이 효과를 보는 방법이 있다.

내 입으로 보약 같은 말을 하는 것이다.



뇌에는 주어가 따로 없다고 한다.

욕을 하는 게 자신에게 더 나쁜 이유다.

뇌에서는 상대방에게 쏟아낸 욕을 자기 자신에게 한 줄 안다.

그래서 남에게 바보라고 말했으면 자기를 바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반면 좋은 말을 하면, 뇌는 그에 어울리는 생각을 계속해서 하게 된다.


오늘,

돈이 한 푼도 들지 않는 데다 남에게 보약 한 첩 지어주는 말이나 한번 해 볼까?

아니, 그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먼저 해주어야겠다.


넌 진짜 잘 될 거야.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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