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윤숙 Jul 23. 2020

인터넷에 낙서하는 사람들

'아님 말고식'은 말길.

중학 시절 하루는 친구들과 언쟁을 벌였다. 책상에 있는 낙서를 보고 낙서의 어원에 대해 갑론을박한 것이다. 당장 사전이 없어 확인 못한 우리는 서로 자기주장을 펼쳤다. 한 친구는 낙서의 '낙'자가 떨어질 낙이라고 했다. 글자를 막 던지듯이 쓰기도 하고 철자법이 엉망이고 글자가 군데군데 빠져있기도 하니. 다른 친구는 즐거울 락이라고 했다. 낙서는 즐거움을 주니까. 나중에 알아보니 '떨어질 락'이 이겼다.






인터넷 상의 악플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다.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 한 장 가지고도 별별 트집을 잡는다. 그 심리는 무얼까? 남이 잘 되는 걸 보는 게 배가 아프거나 심심해서일 것이다. 이는 익명성 아래 온갖 상처주기로 번진다.


인터넷이 없던 예전에는 어땠을까? 그때도 심리상 배설욕구가 있었을 테니. 그때는 '낙서'가 있었다. 동네 담벼락에다 휘갈겨 쓴 수많은 낙서들. 낙서는 글씨뿐만이 아니었다. 온갖 해괴망측한 그림도 있었다. 그 그림들 중에는 낯 뜨거운 내용도 보였다. 가장 잘 팔린 그림은 영어 알파벳 중 X와 Y를 가지고 장난친 것이다.


그 글자로 사람 신체를 빗댄 온갖 낙서로 확장시켰다. 이 낙서에도 여러 '급'이 있었다. 학교 책상 위에 연필로 쓰거나 칼로 새긴 낙서는 그나마 점잖은 편이었다. 가장 은밀하고 수위가 높은 곳은 따로 있었다. 해소의 느낌이 강한 곳, 화장실이었다. 아니 '변소'라고 해야겠다.


깔끔한 수세식이 아닌 재래식 화장실, 그것도 쭈그리고 앉아서 일을 보는 와변식 변기에 오래 앉아 있다 보면 다리에 쥐가 난다. 그런데도 화장실 문짝이나 벽에 예술혼을 발휘해 놓곤 했다. 둘 중 하나다. 대단히 인내심이 있거나 축농증으로 후각을 상실했거나.(당시엔 겹겹이 쌓인 배설물이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발효까지 되었다.) 아니면 변비라서?




학교 화장실 낙서는 유치함과 외설스러움이 정점에 달했다. 당시만 해도 필적 감정 개념이 약했다. 여기저기 낙서가 범람했고, 사진 찍을 도구가 없었다. 또 냄새나는 화장실에 가서 그걸 베껴오기도 힘들다. 게다가 그러려니 하는 문화도 있었다. 화장실 낙서쯤은 '서민문화의 액세서리' 정도라고.


비디오도 없던  그 시절 내 주변에는 건전한 사람들만 가득했다. 낙서는 어린 시절 내게 유일한 야동이자 성교육인 셈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이들이 그런 그림을 어떻게 그렸는지 신기할 정도다. 인도의 수마트라 그림도 아니고.


그런 그림을 보는 것이 수치스러워 얼굴을 돌렸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여자 형제들만 있던 우리 집에서는 들어보지도 못한 그쪽 세계 용어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체 저 말은 무슨 의미일까? 저 말이 왜 저기서 나오나? 하는.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그들이 우연히 알게 된 사진이나 그림들의 단서를 가지고 이리저리 추측하고 돌려서 생각한 끝에 나온 동사나 형용사들이. 평소 놀이나 행동에서 쓰는 용어를 가지고 응용한 것이 많다. 그 발상이 참 귀엽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성교육이 전무했다. 성적인 용어에 대해서 모두들 귀를 닫고 입을 닫았다. 나는 궁금증이 많았다.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아마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였을 것이다. 그 당시 춘향전 이야기가 드라마로 TV에 나오고 있었다. 다른 내용은 다 이해가 되고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한 가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었다. 변사또를 그렇게나 화나게 한 '수청을 거부하는'게 무엇이었는지 말이다. 그 말을 부모님께 꼬치꼬치 물었더랬다. 그러자 아빠는 술을 따르는 일이라고 에둘러 알려주셨다.


그때 내 뇌리에는 술을 따르는 일은 목숨하고 맞바꾸어야 하는 일로 각인되었다. 지조라는 말은 딱히 몰랐지만 왠지 그런 분위기를 감지했다. 뭔가 숭고한 것을 지키는 행위 중에 술을 따르지 않는 것이 포함되어 보였다. 그 교육의 효과는 오래갔다. 지금도 나는 남편에게조차 술을 따르지 않는다.


그 당시 아이들은 그렇게나 순진했다. 그러니 화장실 낙서는 그들에게 충격적인 수준이었던 셈. 아이들은 낙서하는 재미로 수업의 지루함을 견디었다. 수업시간 교과서 표지에도 그렸고, 심지어 잠자는 친구 얼굴에도 그렸다.


이러한 낙서가 즐거움만 주면 좋으련만. 낙서로 인해 학교가 발칵 뒤집힌 적도 있다. 남자 선생님을 짝사랑하던 여자 아이가 학교 벽에다 크게 낙서를 해 놓은 것이다. 그 남자 선생님과 노처녀 선생님이 사귄다는 말이었다. 그 일로 학교가 발칵 뒤집히고 필적 감정이 뒤 따랐으나 범인은 잡지 못했다. 그러나 그 두 선생님에겐 후유증이 남았다.   


그 뒤로 둘 사이는 오히려 멀어진 듯하다. 그러고 보면 낙서를 한 학생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 그 남자 선생님은 그 뒤로도 계속 노총각으로 지냈다. 그 학생은 자기가 그 남자 선생님과 결혼할 것도 아니면서 왜 그랬을까 싶다.


나도 낙서의 피해자다. 6학년 여학생들은 사춘기가 심한 경우 무섭기까지 하다. 조금만 자기 비위에 안 맞는 말을 하면 일평생 뒤끝을 끌고 같다. 집에 가서 내 인형을 만들어놓고 바늘을 꽂지나 않으면 다행.


그런데 내가 경력이 별로 없을 때 무모하게도 6학년 여학생, 그것도 일진 스멜이 나는 사춘기 여학생을 크게 혼냈다. 그러자 나에게 제대로 복수를 한 것이다. 잘 보이는 벽에 내 욕을 써놓은 것. 내용은 차마 말 못 하겠다. 내 성격이 부정적이었다면 극단적인 생각을 잠깐 할 수 있을 정도.


나는 그 낙서의 주인공이 누군지 대번에 알아챘다. 그 여학생 말고는 그런 스케일을 꿈꾸지 못하니까. 그래도 나는 범인 색출작업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범인이 누군지 뻔한데 그 걸 밝히면 보복이 더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를 욕한 것으로 인해 내가 더 화가 나서 밝히는 것으로 오해(?)할 까 봐.

결국 속으로 설움을 삼키며 교사로서의 내공을 기르는 계기로 삼았다. 속으론 '그래. 사춘기니까.'


낙서는 원래 두서가 없고 문맥이 안 맞는다. 철자법도 틀려야 낙서라는 기준에 합당하다. 글자가 빠지고 틀리고... 그게 낙서의 원래 뜻이니까. 만약 정자체로 정성껏, 논리적으로 누가 나를 비난했다면, (비난할 내용이야 너무 많고) 더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그건 이미 낙서가 아니라 '상소문'이다.


인터넷 악플도 마찬가지다. 작가가 되고 나서 가끔 악플 벼락을 맞는다. 그 기분은 '진짜' 벼락에 버금간다. 찌릿하고 심장이 쿵 내려앉고. 그런데 악플도 악플 나름이다. 철자법도 엉망이고, 내용도 억지에다 논리가 하나도 없는 횡설수설은 상처가 별로 되지 않는다. 배운 티 팍팍 나는 완벽한 철자법에 가끔 화려한 문장가가 내 글에 댓글러로 등단하기도 한다. 그땐 앓아누울 정도로 상처를 받는다.


처음부터 말이 안 되는 게 아니다. 말이 엄청 잘 되게 쓰다가 뒤에 가서 이상한 논리로 바뀐다. 갑자기 사람을 땅바닥에 후려쳐 던져버리는 어마어마한 능력치를 발휘한다.


그들은 타고난 것임에 틀림없다. 어떻게 단 몇 줄의 글로 사람을 내동댕이칠 수 있는 건지. 그 와중에 어려운 용어 남발하고 자신의 지식 배경까지 갈아 넣는다. 그러면 무슨 논문의 일부같이 느껴질 정도다.


그런데 문제는 내 글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라는 거다. 아니 이해하기 싫었겠지. 문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로 비판을 하는 것이다. 그 글만 봐서는 논리가 완벽해 보여서 나도 묘하게 설득이 된다. '내가 이 정도로 쓰레기였나?'하고.


관점을 조금만 틀어도 모든 사람, 모든 사건을 비판할 수 있는 게 말, 글이다. 사건은 단 하나, 사람도 단 한 명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해석은 수만 개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제발 이것만 지켜줬으면 좋겠다. 아예 맘에 안 드는 글은 읽지 말던가 읽으려면 빼놓지 않고 제대로 읽던가 하는 것이다.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혹은 몇 마디 말한 것만 가지고 평가는 하지 말기를. 평가를 하려면 그 사람이 쓴 책을 읽어보고, 그가 했던 말도 들어보고 직접 만나서 이야기도 나눠보고 해야 그 사람에 대해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요즘은 대면하지도 않고 이메일이나 카톡으로 인터뷰를 따서 그냥 싣기도 한다.


낙서의 순기능-시원한 배설, 가벼운 농담으로 인한 즐거움이 사라지고 남은 자리는 씁쓸하다. 연예인 험담처럼 '아님 말고 식'. 당사자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하는데 말이다. 성숙한 인터넷 예절이야말로 인터넷 강국 대한민국이 지켜내야 할 '데드'라인이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비난보다 못한 칭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