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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Jul 17. 2020

비난보다 못한 칭찬

말은 속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어렸을 때 많이 부르던 만화 주제가가 있다.

"사람이 되고 싶다 사람이 되고 싶어. 뚜루뚜루뚜"

당시 인기가 있던 '피노키오' 만화 주제가다. 피노키오는 나무로 만든 인형이다. 나무인형이 사람이 되고픈 마음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그 가사가 나에게는 엉뚱하게 쓰인 적이 많다. 사람은 사람인데 '진짜 사람'. 즉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 싶어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불과 40대 중반까지다. 내 인격이 한참이나 모자란 듯이 느껴졌다. 사람들과 만나서 웃고 떠들고 나면 항상 뒤가 허탈했다. 내가 한 말들 때문이다. 표정이나 몸짓은 시간이 지나면 애매한 이미지로 남는다. 그런데 말은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다. 그런데 그 말을 실수한 것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것도 꼭 돌아서고 나서.


말로 하는 실수의 종류는 셀 수 없이 많다. 그중에서도 가장 후회되는 건 상대방에게 빈정거리거나 부정적인 뉘앙스로 말한 것이다. 대놓고 비난을 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칭찬하듯이 말했는데도 돌아서면 기분이 나빠지는 말들이 있다.



요즘은 내가 드디어 사람이 되었나 보다. 마치 피노키오가 거짓말을 하지 않아서 사람이 되듯이.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 전엔 나도 거짓이었다. 거짓을 감추자니 미운 말투가 튀어나왔던 것이다. 속 마음을 감추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다들 꽁꽁 몇 겹을 감싸서 숨겼다고 착각을 한다. 하지만 여지없이 드러난다. '말'에서.


참 이아러니한게 남이 슬퍼하거나 괴로워할 때 공감하는 건 쉽다. 문제는 남이 잘 되었을 때다. 그때 진심으로 칭찬해주는 사람은 인격자임에 틀림없다. 상대방이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라도 말이다. 오히려 나랑 가깝고 좋아하던 사람이 잘 되면 더 배가 아픈 게 사실이다.


심지어 형제끼리도 질투한다. 그때 진심에서 우러난 칭찬을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내가 사람이 덜 되었을 땐 잘 몰랐다. 지금 와서 보니 덜 익은 내가 했던 말은 칭찬이 아니었다. 속마음을 은근히 들킨 것이다.


예를 들어 가깝게 지내던 지인이 갑자기 먼 친척으로부터 땅을 물려받았다. 그 친척은 평생 혼자 살다가 자식도 없이 죽었는데 자동적으로 딱 하나 있는 조카에게 상속이 된 것이다. 그러자 평소 쪼들리던 지인은 갑자기 부자가 되었다.


그러자 다들 축하해주는데 나도 분명 축하하는 말을 하긴 했다. 그때 내가 했던 말은,

"좋겠다. 이제 얼굴 보기 힘들겠네. 부자  사모님들하고 어울려야 하니."

이건 칭찬도 아니고 축하도 아니다. 그저 부러움과 빈정거림과 시샘일 뿐.


지금이라면 달리 말했을 것이다.

"평소 주변 사람에게 잘하더니 복을 받나 봐. 난 반드시 네가 잘 될 줄 알았어."


내가 그동안 들어본 칭찬 아닌 칭찬, 내지는 비난보다 못한 칭찬은 수없이 많다.

기억나는 대로 적어보면,


-살이 빠진 사람을 보고

"어머 살이 왜 이렇게 빠졌어.. 그동안 어디 아팠나 봐. 어휴 볼이 쑤욱 들어간 거 봐. 그러게 무리하지 말랬잖아."

(속으론 살 빠진 게 배 아파서 미칠 지경이면서.)


-승진 한 사람에게

"그렇게 죽도록 일 하더니 결국 승진하는군. 나는 그냥 이대로 살다 죽을래. 나는 절대 아부도 못하고 야근도 안 할 거니까"

(자기가 밤새 써서 제출한 보고서가 탈락되었다는 사실은 왜 말 안 하는지. 마치 상대방은 상사에게 아부하고 일중독자에다가 주변 사람에게 위화감만 조성했다는 취지의 말 같음.)

-국내 탑급 남자 배우들만 골라서 연애하는 여배우를 보고,

"여자가 얼마나 꼬리를 치면 그렇게 남자들이 달라붙겠어? 나는 절대로 그렇게 안 살아."

(자기가 어떻게 살든 그 남자 배우들이 연애하자고 하진 않을 듯. 꼬리를 친다고 아무나 멋진 남자들이 오지는 않으므로.)


-남의 집에 놀러 가서 집이 엄청 깨끗한 걸 보고,

"어머. 집이 무슨 호텔처럼 깨끗하네요. 하루 종일 청소만 하시나 봐요. 저는 대충 치우고 매일 책만 읽어요."

{살림 실력이 뛰어난 사람은 하루 종일 일하지 않아도 집이 정돈되어 있다. 살림을 잘하시네요 할 것을 굳이 자신의 지성미를 드러내는 말로 끝내야 하는지.)


-오래된 가구를 버리지 않고 솜씨 좋게 리폼한 것을 보고는,

"이렇게 해 놓으니 완전 새거같고 멋있다. 근데 돈 벌아서 다 뭐해. 새것도 좀 사지. 그래야 나라 경제가 돌아가지."

(가구 리폼 재주를 칭찬해주면 어디 덧나나?}


-상을 받거나 축하할 일이 생기면,

"어머 축하해. 여기 모두에게 한턱내야겠다. 안 그래?"

(하필 모인 사람이 100명이나 될 때. 누구 파산하는 걸 보고 싶은 건지.)


-집에 초대해서 오징어볶음 등 맛있는 요리를 한 상 차려 준 사람에게,

"오징어 볶음을 그냥 해도 맛있네요. 저는 꼭 따로 데치고 나서 하는데. 그러면 잡내가 싹 사라지거든요."

(그래서 지금 오징어에서 잡내가 난다는 건지. 저 여자를 내 전화번호부에서 그냥 싹 지우고 싶다.)


-화장기 없이 수수한 차림으로 나간 나에게,

"생얼도 예쁘시네요. 저는 감히 화장 안 하고는 외출을 못 해요. 나이 든 여자가 화장 안 하고 나가면 매너가 없다고 할까 봐서요."

(그럼 나이 들어서 화장 안 하고 나간 나는 매너가 제로인 건가.)


-각종 모임에 꼬박꼬박 참석하는 나를 보고 하는 말,

"어머. 한 번도 안 빠지시네요. 출석상 받으셔야겠다. 저는 워낙 모임이 많아서 여긴 자꾸 빠지네요."

(자신이 인싸임을 이렇게 증명하는 건가? 그렇담... 나는 아싸인 건가...)


-행사가 끝나고 복잡한 정산을 하는 과정에서 속으로는 자기가 더 가질 줄 알았다. 그런데 의외로 정확하게 나누자 실망한 끝에 나온 말,

"평소 네가 어수룩한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되게 똑똑하다. 아주 정확하게 따박따박 챙겨갈 줄도 알고."

(당연하지. 그럼 내가 누구 좋으라고 어수룩하게 다 뺴앗겨...)


차라리 칭찬을 하지나 말 것이지. 제발 그들이 칭찬의 탈을 쓴 모략+시기+비난+조롱을 멈추길. 문제는 자기들이 엄청 똑똑한 줄 안다는 거다. 그리고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은 무엇으로도 감출 수가 없다. 생선을 감싼 신문지에서는 비린내가 날수 밖에. 비린 마음을 상큼한 레몬 말투로 감싼 들, 결국 비린 레몬이 되는 것이다.


요즘 그나마 사람이 된 나는 그런 게 다 보인다. 그리고 과거의 덜된 나의 과오도 보인다. 중요한 건 먼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독서, 봉사, 명상, 감사일기, 무엇이라도 해서 먼저 사람이 되면 된다. 말이라는 건 생각이 밖으로 표현된 것일 뿐이니까. 스피치 확원에 등록해서 엄청난 훈련을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이 가다듬어 있지 않다면,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시기가 남아있다면 되지도 않는 칭찬을 거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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