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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Nov 20. 2020

'낀'세대 말투

위아래로 짐을 진 불쌍한 586세대,  하지만 우린 바뀔 거다.

요즘 안 쓰는 말 중에 '낀 세대'라는 게 있다. 가난했던 전후 부모님과 풍요로운 신세대 자녀 사이에 낀 현재 586세대들에게 주로 쓰였다. 그 세대들은 현재 어떨까? 불행하게도 여전히 끼어 있다. 경제적인 부담까지 지면서.


그 세대에 속한 나로선 항상 '꼭 끼인 듯한 불편함'을 느낀다. 말투는 세대와 문화를 반영한다. 애매한 포지션은 말투로 드러난다. 찢어지게 가난하지도, 그럴싸한 풍요도 누리지 못한 채 덜렁 부담을 짊어진 세대.

그나마 공정하게 대학에 들어갔고, 취업이 쉬웠다는 이유로 지금도 위, 아래로 '부양'이라는 짐을 떠안고 있다.(공중 부양하고만 싶다.)


부담감은 일탈을 허용하지 않는다. 성실하게 버텨야 부모님에게 생활비 드리고 간혹 있는 캥거루 족 자식을 데리고 살 수 있다. 경제적인 부담감 외에 다른 부담도 있다. 부모님을 모시지 못 희미한 죄책감. 모두 말투에 반영된다. 당차고 쿨한 요즘 세대와 다르다. 좋게 말해 공손하고, 안쓰럽게 말해 눈치 보는 말투라고나 할까? 그런 말투에는 어떤 게 있을까?


"톡 까놓고 말해서"

요즘 세대들에게 이 말은 별로 의미가 없다. 이미 충분히 솔직하니까. 우리 세대엔 그러지 못했다. 직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월급이 늦어져도 대놓고 말하기 힘들었다. 솔직하면 모난 돌로 눈에 띄어 정에라도 맞을까 봐 속으로 삭히곤 했다. 속앓이를 하다 아주 가끔 소심한 일탈을 하기도 했다. 이를 겨우 말로 꺼낸 거다.


"~이지 싶다."

요즘 세대들도 쓰는 말이지만 우리 시절엔 말끝마다 확신 없는 말투가 많았다. 자기 의견을 자유롭게 말할 수 없는 사회 분위기도 있었지만 o, x 내지는 사지 선다 형 문제에 익숙한 우리에게 정답이 아니면 말하기 꺼려지는 것도 있었다. 그러니 이도 저도 아닌 '~인 것 같아'는 맞다고도 틀렸다고도 말할 수 없는 말투다. 대충 뭉뚱그려서 묻어가려는 심리가 깔려 있다.


"내가 보기에는~"

이 말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말이다. "내가 보기에는~"이라고 사족을 붙이는 이유가 뭘까? 여기엔 내 생각을 말하는 데 대한 부담감 내지는 두려움이 깔려 있다. 내 생각이 맞는지, 웃음거리가 되진 않을지. 예전엔 집단의 이익이 우선이었고 자기 의사를 공공연히 드러내기 힘들었다. 남보다 튀면 안 된다는 무의식적인 압박감도 있다. 그래도 뭔가 해야 할 말이 있을 때 슬그머니 덧붙이는 말이다.


"나 때는 말이야"

말할 것도 없이 꼰대스러운 말투다. 누구나 잘 나가던 때가 있다. 이를 밝히려고 조건만 마련되면 무조건 반사로 튀어나온다. 우리 시절이 얼마나 궁핍했는지도 말하고 싶다. 그 조건에서 일해 봤느냐. 내가 의지력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줄까 하는 마음. 또 직장이나 군대 문화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거품 물고 말하려는 초입에 튀어나오는 말이기도 하다. 불행한 건 누구도 이 대화에 끼어들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뭐?" 하는 분위기. 침이 튀기면서 한 창 말을 할 즈음 누군가 화제를 돌리거나, 다들 자릴 뜨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누구긴 누구, 시대에 뒤 떨어진 꼰대지.)


"텔레비전에 나왔는데."

이 말에는 개인의 생각이 없고, 미디어에서 나온 건 무조건 믿는다는 생각이 깔려있다. 아무리 뜨거운 논쟁 중이더라도 이 말 한방이면 "그래?" 하면서 깔끔하게 종료되었다. 예전엔 새로운 정보라고 해봐야 다른 사람의 말을 전하는 게 고작이었다. 또 대부분의 대중적인 정보를 텔레비전에서 얻었다. 채널도 서너 개라 맹신할 수밖에. 요즘 어르신들이 유튜브를 맹신하는 것과 비슷하다. 어르신들은 텔레비전 방송과 유튜브 방송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가짜 뉴스에 현혹되기 쉬운 것이다. 친정아버지는 내가 유튜브 하는 걸 보고는 뭔가 대단한 출세를 한 것으로 아셨다. 방송국을 누가 차려줬느냐며. 공짜로 아무나 할 수 있는 거라고 해도 이해를 못 하신다. 그 약점을 가짜 뉴스 제작자들이 파고든다.


"외람된 말이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 말을 안 어울리게 쓴 적이 많다. 남에게 좋은 정보를 제공할 때나 잘못을 지적할 때 둘 다 이 말을 했던 거다. 즉 남에게 이득이 되는 상황에도. 상대방이 충고를 원치 않을 수도 있고 잘난 척한다고 할까 봐서 소심한 거다. 어원을 알 수 없는 이 말을 요즘은 잘 쓰지 않는다. '외람되다'라는 말이 고사성어같이 들릴 정도다. 이렇게라도 충고를 해야 하나. 어설픈 간섭보다는 타인의 선택이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는 게 나을지도.



써 놓고 보니 요즘도 쓰는 말이 있긴 하다. 하지만 우리 때와 말이 갖는 무게의 경중이 다르다. 우리가 하는 말을 저울에 재어 볼 수 있다면 예전 시절의 말이 요즘 말의 10배는 나갈 거다. 요즘은 말 외에도 글이나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서 소통하기 때문.


젊은이들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꼰대스러움이나 정작 원하는 사람이 없는 간섭 등. 핑곗거리가 있다. 시대가 낳은 소심함, 끼인 자의 애매함, 단답형 시험 폐해 등등등.


를 알586세대를 지금보다 더 이해해줄지. 그리고 우리도 변할 거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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