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윤숙 Nov 13. 2020

잘못에 대해 정중하게 말하되, 퇴로를 열어주자.

어쩔 수 없이 내가 미운 소리를 대신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자주 가는 도서관이 있다. 미니 도서관인데 크기가 작다 보니 아늑하고 이용자도 별로 없다. 마치 내 개인 도서관 같다. 단 하나 참을 수 없는 게 있었다. 무려 이용자도 아니고 도서관 직원들의 수다 소음이었다. 보통 두 명이 컴퓨터 업무나 서가 정리를 했는데, 한 명은 50대, 한 명은 30대 같았다.


둘이 자리에 앉아 사무를 볼 때도 있는데 이땐 동창 친구들처럼 수다를 떨었다. 대화 내용을 몰랐을 땐 업무가 많나 보다 했다. 그런데 안 들으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울려 퍼지는 장소의 한계가 있었다. 둘이 하는 소리는 대부분 잡다한 수다였다. 설령 업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 도서관은 열람실이 따로 없었다. 한 공간에서 도서 열람과 공부를 같이 했다. 이십 대 젊은이들이 시험공부하러 온다.


그런 장소가 시끄러우면 집중이 안 되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직원들이 나이가 많아서 함부로 말을 못 한 듯하다. 내가 나서기로 했다. 처음엔 도서관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게시판에 남길까 했다. 그런데 그 경우 내 아이디가 노출된다. 이용자가 별로 없는 도서관에서 누군지 금방 알 수 있다. 괜히 앙심을 품고 밤에 나오다 봉변을 당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관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까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면 관장한테 혼나서 보복할까 두려웠다. 도서관으로 발신자 없는 투서를 할까 하다가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폰을 귀에 꼽고 책을 읽을까 하다가 둘러보니 대부분 이어폰을 꼽고 있다. 소음을 차단하기 위해서 음악 이어폰이나 소음방지 이어폰을 끼는둣.


다들 괴로워하는구나. 내가 나서야 했다. 마치 인류를 악의 무리에서 구출 해내 기라도 하듯 가상 시나리오를 짰다. 먼저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만들어보았다. 내가 화를 내는 버전과 점잖은 버전 둘 다. 화를 내면 저쪽도 발끈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저쪽과 나는 2:1이니 내가 불리하다. 다른 이용자들이 구원투수로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최악의 시나리오도 짜 보았다. 한 이용자가 그러는 거다. "나이가 들면 귀가 밝아진다더니 너무 예민하신 거 아니에요?"라고. 그러면 나는 인류 구원은커녕 있지도 않은 쥐구멍을 찾느라 분주해질 거다.


그러다가 내 나이가 어때서? 하다가 맞아. 내 나이는 내 나이에 맞는 언어를 사용하자 라는 대견한 생각을 했다. 내 나이가 어때서는커녕 내 나이니까 가능한 걸 떠올려보는 거다. 그래. 나는 저 직원 또래다. 저 직원도 저 나이까지 맹렬하게 일하는 게 보기 좋다. 대부분 도서관 직원들이 젊은데 말이다. 또 저쪽도 나를 바라볼 때 호감이 갈 것이다. 매일 오는 것 같은데 저 나이에 매일 일삼아 책을 읽다니 대단하다 하고. 노안이 오는 나인데. 나는 30분만 책을 봐도 눈이 피곤해서 힘든데 어쩌고 저쩌고. 이런저런 구상을 하다 보니 용기가 생겼다.


침을 한번 꿀꺽 삼킨 후 조심스레 다가갔다. 무릎을 구부리고 정중하고 조용한 음성으로,

"저기요. 정말 죄송한데요. 아주 조금만 작은 소리로 말씀해주시면 안 될까요? 여기가 작아서 그런지 소리가 너무 울리네요. 게 말씀하셔도 그렇죠? 외람되게 이런 부탁을 드려서 다시 한번 죄송한 말씀드려요."

정중함에 대한 강박관념이 얼마나 심했으면 문어체까지 동원한 그 비굴함이란.(자존심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게 아니라며.)

그러자 경우의 수 중 가장 좋은 상황이 펼쳐졌다. 최소한의 대거리도 없이 둘 다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죄송하다고 했다.(이럴 땐 내가 더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카운트 펀치를 준비했는데 손 자체를 뒤로 감추어야 할 판이니.) 내가 정말 죄송하다고 거듭 말하니, 아니라고 자기들이 잘 못 한 거라고 정중히 내게 사과한다.


그 뒤로 그 도서관은 그 어느 도서관보다 낮은 데시벨을 자랑하게 되었다. 나도 도서관 가는 마음이 가벼워졌다. 남에게 불편을 호소하는 게 이렇게 쉬울 일이었는지.


전엔 부당한 일을 당해도 소심한 마음에, 또는 보복이 두려워서 한 발짝 물러서곤 했다. 만약 내가 용기를 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젊은이들은 계속 소음에 시달릴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어제 보니 이어폰을 뺀 젊은이들이 종종 눈에 띈다.


나 하나만 빠져 버리면 되지 뭐. 아니면 나만 미움 당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 이건 또 하나의 이기심이다. 남에게 꽃길만 걸으소서. 식의 좋은 말은 누구나 하기 쉽다.  잘못된 일을 수정하기 위해 부탁 내지는 불평을 말하는 건 누구에게나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하나둘 손을 놓고 떠나버리면, 이 사회는 좋아지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잘못을 지적받는 데 대해 저항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지적하는 사람의 태도나 말투가 중요하다. 앞으로도 지적질을 해야 할 일이 생기면 이번처럼 해볼 생각이다. 즉 매우 정중하게 하되, 딱 한 가지만 팩트로 말하고, 그 사람이 그럴 수밖에 없었을 이유를 함께 나열하는 것이다. 그 말은 충격을 완화시켜주는 충전재이자, 공감 어린 퇴로를 열어 놓아 숨통을 틔워준다.


나이 덕도 보았다. 어린 친구가 그런 말을 했으면 정중하게 말해도 건방지게 보일 수 있으니.

'내 나이가 어때서?' 어떻긴 뭐가 어떠냐. 이렇게 좋지. 여러모로.

매거진의 이전글 "예쁘시네요."는 칭찬일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