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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Oct 05. 2020

과연 예민해서일까?

예민함으로 코팅한 상처.

어릴 적 읽은 동화책 중 '강낭콩 한 알 공주 이야기'라는 게 있었다. 한 공주가 길을 잃어(이 부분을 보면 이해가 안 간다. 어느 나라 공주가 시녀도 없이 길을 가다가 길을 잃는단 말인가) 한 집에서 숙박을 부탁한다. 그때 주인은 공주니까 흔쾌히 수락한다. 그런데 다음날 문제가 생긴다. 공주가 아침에 일어나더니 불평을 하는 것이다. 주인이 밤새 잘 잤냐고 물어보자, "잘 자긴요. 밤새 뒤척이느라 한숨도 못 잤어요. 침대 밑에 뭐가 있는 건지 등이 배겨서요."



내막은 이렇다. 주인은 낯선 여자가 공주라는데 행색이 초라하고 의심이 되는 게 많았다. 덜컥 믿고 재울 수 없었던 것. 이에 꾀를 냈다. 보통 공주라고 하면 예민하고 까다로울 거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래서 테스트를 한다. 공주가 자는 방 침대에 시트를 일곱 겹 깔고 맨 밑에 강낭  한알을 깔아놓은 것. 폭신하고 호화로운 침구에서 자는 공주라면 이 정도 불편함은 곧 알아챌 거라고 본 것이다. 그 테스트에서 공주가 합격을 한 것이다.(참, 동화책 내용하고는.)


현대판 공주 테스트를 한다면... 단연 내가 1등이다.






9년 전 일이다. 어느 날부터 숨이 잘 안 쉬어지고 목안이 답답했다. 시간이 더 흐르자 목 한쪽에 콩알만 한 것이 박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 병원에 가서 이것저것 검사 후 알아낸 것이 5밀리미터 크기의 갑상선암이었다. 크기는 작지만 위치나 예후가 나빠서 급하게 수술을 했다. 수술 전 의사 말이, 어떻게 이걸 느꼈냐고.


덤덤히 말했다. 콩알이 내 목에 느껴졌다고. 의사는 말도 안 된다고 했다. 7센티미터 크기의 혹도 감지하지 못하는 법이라고. 대부분의 암이 그렇지만 자각증세로 오는 법은 없고 우연히 검진으로 알아낸다는 것이다. 특히 갑상선암은 증상이 거의 없어서 다른 부위 초음파 검진 시 우연히 발견한다고.


나는 진짜로 느꼈다고 박박 우겼다. 억울했다. 마치 장금이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홍시맛(콩알만 한 혹)이 나서(느껴져서) 홍시맛(혹)이라고 한 것인데, 왜 홍시맛(혹)이 나느냐(느껴지느냐)고 하시면..


하도 우기니 의사는 나보고 알았다고 했다. 정말 그걸 느꼈으면 기네스북 감이고, 나보고 매우 러키 한 사람이라고 했다. 예민함이 목숨을 살렸다고.(나중에 알고 보니, 내 경우는 임파선까지 전이되었고 폐까지 가기 직전이어서 목숨도 위협받았다고)


나는 그때 어릴 적 읽은 강낭콩 공주 동화가 떠올랐다.(어린 소견에도 B급 동화로 치부했건만.) '그래. 나는 공주다.'


그 예민함이 나를 공격하곤 한다.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생각 과잉'으로 이어진다. 처음엔 예민함이 정신적인 기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감의 예민함이 먼저라고 한다. 실제로 후각, 미각, 촉각 등이 지나치게 예민하다.(단 청각이 가는귀먹는 수준으로 둔한 것이 다행이다.) 오래전 눈썹 문신을 하는데 분명 마취 연고를 발랐다는데도 통증이 너무 심해서 한쪽 눈썹만 하고 끝내 달라고 했다. 원장이 달래고 달래서 짝짝이를 면했다.


이런 예민함이 예민한 생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한 때 별명이 '오버코트'였다. 이유는 대화중 누가 농담을 한 번 던지면 나는 그 농담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가는 바람에. 누가 봐도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펴다가 빙그레 웃는 내 얼굴을 볼 수 있다고 했다. 그 오버가 문제인건 때론 어불성설 오해를 낳는다는데 있다.


최근 지인과 오해를 풀었다. 이야기를 하던 중 내가 너무 앞선 사고를 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오해'의 출신성분은 내 상처의 '자가증식세포'였다. 지인은 또 지인 나름대로 상처가 있었다. 내가 전화를 해도 잘 받지 않자 자격지심에 상처 받았던 것.


둘 다 참 못났다. 가끔 단단하고 화려해 보이는 사람도 내면은 쿠크다스보다 못한 멘털이었음을 알게 된다. 알고 보면 다들 생채기를 품고 다닌다. 그 생채기가 뜬금포로 튀어나와 아무 데나 짝짜꿍을 하는 것이다. 평소 압축 스프링으로 눌러놓았던 것처럼. 지인과 나의 대화도 지금 복기해 보니 '상처 대 상처 타이틀 매치'였다.


동화 속 이야기를 조금 비틀어본다. 주인공이 공주로 살아와서 예민한 걸까? 아니면 비참해진 자신의 처지가 서러워 예민해진 걸까? 일단 남의 집에서 마음 편히 잘 수가 없었을 것이다. 떵떵거리고 큰소릴 쳤지만, (초라한 자신의 몰골을 숨기려고) 마음은 위축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새우잠을 자면서 뒤척였을 것.


내가 그랬다. 목에 콩알을 느낄 당시, 그 땐 중국에서 사업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온 직후였다. 모든 게 피폐했다. 온갖 근심으로 웅크리고 자니 아침에 일어나면 개운치 않았다. 침대 밑에 콩알이라도 박힌 것처럼.  


이는 '예민함' 이 아니라 '상처'였다. 상처가 많다 보니 모든 것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을 줄 안다고, '고통의 맛' 도 그렇다. '그놈'을 겪어 본 사람만이 느끼는 '처참함', 이는 처음 겪을 때의 당황스러움과 다르다. 탄식으로 맞이하는 '기시감'이다. 여러 번 겪는다고 무뎌지는 게 아니다. 아는 이라 어쩔 수 없이 음미까지 하게 된다.


학교에서 아이들과 잘 다투는 아이들을 보면 대부분 상처가 많은 아이들이다. 그 아이들이 싸움을 거는 과정을 들어보면 보인다. 그저 아이들이 와서 등을 툭툭 치고 말을 건다. 그때 상처 많은 아이들은 발끈 화를 내며 왜 자길 무시하고 때리냐고 한다. 그러면 등을 친 아이는 어이없어한다. 자기 보라고 등을 슬쩍 두드린 것뿐인데.


누가 자길 쳐다보면 째려봤다고 주먹을 날리는 아이도 있었다. 그 아이는 가정 폭력의 피해자였다. 그 아이가 당한 피해를 똑같이 다른 아이에게 행동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 아이들을 상담할 때 교사들은 처음부터 문제 있는 학생, 폭력성 있는 학생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예민하다고 에둘러 말한다. '남들의 말에 예민하게 반응한다.'라고.


어른들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쉰이 넘고 아마 예순이 넘더라도. 이 예민함은 '상처'라는 본모습을 숨긴 채 살아갈 것이다. 언제 어디서 또 다른 상처와 만나서 조용히 스파크를 일으킬지 모른다. 어쩌면 '도를 닦는다'는 것은 모든 상처에 둔해지는 과정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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