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균, 쇠'의 저자 제레드 다이아몬드가 방송에 나왔다. covid19로 인해 삶이 어떻게 달라질지 화상으로 논의하는 자리였다. 그는 강경화 장관의 질문에 답하고 있었다. 강경화 장관이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현재 우리나라가 처한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인지.
예상되는 답변은, 빈부격차나남북 대치로 인한 경제 손실 등이었다. 뜻밖에도 그는 다른 얘길 꺼냈다. 여성의 사회참여저조라고. 예상치 못한 답변에 충격이었다. 우리나라는 선진국이다. 방역능력은 세계 1등이다. 그런데 여성의 사회진출이 뒤처져 있다니. 그게 가장 문제라니.
주변을 봐도 그렇다. 내 나이 대까지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 드물다. 반대로 남자들은 어디에서든 일하고 있다. 원인에 여러 가지가 있다. 아이를 낳으면 독박 육아에 당첨된다는 사실이다. 요즘엔 남자들이 육아휴직을 내기도 하지만 아직까지 대부분의 여성이 육아를 책임지고 있다. 대충 키워도 안된다. 사회에선 아이들에게 고학력과 여러 스펙을 요구한다. 육아를 책임진 여자들이 갖는 부담이 상당하다.
예전에 본 영화를 다시 보다가 새로운 걸 깨달을 때가 있다. 유지태와 이영애 배우가 주인공으로 나온 '봄날은 간다'라는 영화다. 영화 속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는 최근까지도 명대사로 회자되고 있다. 또 여자가 남자를 유혹하는 장면에서 나온 대사, "라면 먹고 갈래요?"도 많이 써먹는다.
젊었을 땐 남자 주인공이 가여웠다. 이 영화로 유지태 배우에 대한 연민이 있다. 그가 가련하면서 냉소적인 미소를 지을 때마다 영화에서 실연으로 실성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번엔 다른 생각이 들었다. 사랑을 변하게 한 건 그가 아닐까? 하는.
여자와 남자 사이에 균열이 시작되는 장면-남자가 김치를 먹다가 여자에게 말한다. "당신이 담근 김치를 먹고 싶어." 이영애는 '친절한 금자 씨'표정으로 말한다. "김치 담글 줄 몰라."
남자는 부모님, 할머니 등 대가족 속에 산다. 자연스레 여자가 자기 가족을 모실 줄로 알았다. 하지만 여자는 아니다. 그녀는 단지 남자의 순수하고 열정적인 모습, 사람 자체에 반한 것뿐이다. 그가 줄줄이 달고 있는 조건들과는 별개로.
남자는 당연히 자기 식구들을 섬겨야 하는 것으로 안다. 남자는 알아채야 했다. 여자가 첫 결혼에 실패한 것은 일하는 여성이 갖는 딜레마 때문이었을 것이다 라고.
남자들은환상을 갖는다. 즉 여자가 돈도 잘 벌어오면 금상첨화지만 살림은 필수라는 것. 여자가 그 모순 때문에 이혼한 거라면 앞으론 결혼에 신중할 거다. 남자는 처음부터 여자와 많은 걸 의논하고, 경우에 따라 분가 계획을 세워야 했다. 자기 편한 대로 미래를 설계한 게 문제다. 그래 놓고는 여자가 사랑이 식었다고?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고?
사랑했다면 그 싹을 꽃으로 피울 수 있어야 한다. 어찌어찌 싹이 텄다고 저절로 꽃까지 피울 줄 알았던 거다. 물 주고 거름 주고 햇빛을 보여 주어야 꽃이 필까 말까인데.
그래 놓고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고? 상대방이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먼저 살폈어야 한다. '사랑'이라는 나약한 감정을 현실에 맞추는 건 반대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나를 사랑한다면 내 상황에 맞춰. 하는 방식으론 어림없다.
종종 '결혼'이라는 거대한 덩어리 앞에서 여성의 경력이 무너지는 걸 본다. 여기엔 복잡한 문제가 더 얽혀 있다. 아이를 둔 엄마들에게 불문율이 있다. 즉 아이가 저학년까지만 해도 엄마가 일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가 4학년 정도 되면 오히려 직장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이는 한창 시춘기가 시작되는 시점이라 정서적 안정이 필요하기도 하고, 이때쯤 학업 난이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때 엄마가 아이들의 학원 선택이나 스케줄 관리에 소홀하면 학업에서 낙오된다는 뜻이다. 대체로 여성이 직장에서 중요한 업무를 맡게 되는 시기인데, 이 시기에 일을 놓으면 복귀하기 어렵다.
제레드 다이아몬드에게 이 불합리함을 들켰나 보다. 질문을 던진 장관이 여성 장관이라 새삼스러웠다.
앞으로 백신이나 치료제가 나와서 코로나 위기를 넘긴다 해도 또 다른 바이러스의 등장을 막을 수는 없다. 자연 생태계의 파괴로 인한 경제적인 여파가 심각하다.
자연 생태계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가치가 무얼까? 균형이 아닐까? 동물과 식물, 바다와 산, 흙과 바람 모두 서로 적당히 댓 구를 이루면서 균형점을 찾아야 생태계가 유지된다. 사람에게는남자와 여자가 출생 비율이나 사회참여 등 모든 면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한쪽의 희생만을 강요하거나 한쪽만 성장하는 건 자원 낭비이기도 하다.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원래 생물학자다. 그가 보기엔 남녀 사이의 불균형은 또 다른 생태계 위협을 가져올 거라 생각하는 듯하다. 직업 생태 계일 수도 있고 경제 생태계, 무엇보다 감정 생태계 면에서 그렇다. 감정의 생태계가 무너지면 가족이 해체되는 수순을 겪는다.
주말만 지나면 온몸이 뻐근하고 더 피곤하다. 월요병이라고 치부하기엔 의심스럽다. 결혼 전엔 월요병에 신체적인 건 들어가 있지 않았는데. 주말에 뭘 했길래? 하고 생각해보니 밀린 집안일 하느라 종종거렸던 것만 떠오른다. 남편이 도와주긴 했지만.
이 말에는 엄청난 모순이 숨어있다. 도와준다고? 집안일이 그럼 내 소관이었다는 건데. 남자들이 집안일을 도와준다는 말은 마치 그들이 부인에게 성은을 베푼 것쯤으로 들린다. 먹는 것도 같이 먹고 입는 것도 같이 입고 목욕탕도같이 쓰는데.
먹이사슬까지는 아니어도 생태계 시스템이 엄연히 작동하는 곳, 그곳은 가정이다. 그 시스템 안에서 균형 있게 발전해가려면 둘 다 노력해야 한다. 여자도 남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