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 잘 쓰는 사람이 부러웠다. 동경하는 글씨체가 있다. 단정하고 모던한데 정감까지 가는 글씨, 유튜브를 검색하다가 알게 되었는데 그 글씨체를 따라 써보곤 했다. 하지만 내 몸의 세포들은 이제 굵직하고 단단한 탄성을 자랑한다. 이내 무근본 글씨체로 돌아오곤 했다. 요즘은 글씨 잘 쓰는 것에 대한 집착까지 생긴다. 사람들에게 나를 드러내는 건 외모, 목소리, 글씨체 등이다. 이들은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간단하게 나를 보여준다. 특히 글씨를 잘 쓰면 어디에 제출하는 서류에 신상정보를 쓸 때마다 뿌듯하고, 직장에서는 능력자처럼 보이기 쉽다.
글씨체에는 그 사람의 성격이 담긴다. 글씨체가 수시로 변하는 것도, 예쁜 글씨로 잘 써보려는 것도 다 내 변덕과 욕심 때문이다. 남편은 연애시절부터 지금까지 한 가지 글씨체를 고수하고 있다. 아니 고수라기보다 무심한 필기자일뿐이다. 20대 때 나에게 삐삐 번호를 처음 적어주었을 때 그대로, 'ㅎ'의 점은 세로로 꽂아 쓰고 'ㅠ' 받침은 날아갈 듯 사선으로 쓴다. 전체적으로 글씨 모양이 예쁘진 않지만 자기만의 형태가 있고, 크기도 일정하다. 무엇보다 하얀 백지 위에서도 글씨 줄이 수평을 이룬다. 글씨 하나하나로 볼 땐 별 거 없는데 전체적으로 통일감이 있다. 이 글씨체는 딱 남편을 닮았다. 남편은 연애시절부터 지금까지 성격이나 행동이 그대로다.
반면 나는 아직까지도 내 글씨체가 없다. 글씨체가 점점 더 나빠진다. 손가락 힘이 없어지기도 했고, 바빠 죽겠는데 한 글자 한 글자 예쁘게 쓰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또 줄 없는 종이에 쓰니 삐뚤빼뚤하다. 결국 자유분방체로 돌아간다. 자판에 비해 손글씨 쓰는 일이 줄기도 했다. 초등학생들은 또박또박 글씨를 쓴다. 낱글자 하나하나에 집중하니 그렇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나면 달라진다. 바쁘기도 하지만 겉멋이 든다. 이미 너무 많이 썼고, 잘 쓰는 방법을 '안다고 생각해서' 휘갈겨 쓴다. 그러다 보니 글씨가 원래의 형태를 잃고 방황한다.
한글을 잘 쓰려면 기본적인 낱자를 하나하나 잘 써야 하고, 조합해서 나오는 글자를 다 연습해 보아야 한다. 이쯤에서 세종대왕의 업적이 위대해 보인다. 영어는 낱글자 하나하나 나열만 하면 되니 다양한 글씨체를 만들어낼 수가 없다. 한자는 많은 글자를 외워야 한다. 글씨를 잘 쓰려면 회화 수준의 솜씨가 필요하다. 즉 낱글자도 배열해야 하지만 부수끼리 서로 조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글은 그 중간쯤 된다. 영어처럼 반복되긴 하지만 모음과 자음, 받침 등이 어울려야 한다. 그 과정에서 변수가 생기니 잘 쓰기 힘들다. 변수는 기본에서 자꾸 떠나게 만든다. 글씨를 잘 쓰는 일이 어려운 건 모든 '힘든 일들'의 이유와 같다. 초심을 잃었기 때문이다. 원래 있던 자리로 가서 점검하면 될 것을.
본의 아니게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많은 때이다. 오늘부터 모든 수업이 온라인 수업으로 바뀌었다. 아이들과 하려고 재미있는 활동들을 준비했었는데. 원래 이 무렵(방학 직전)은 교사들에게 가장 출근하기 싫은 시점이다. 이불속에서 나오기 싫은 추위에다가 학생들이 방학을 앞두고 들떠서 말을 안 듣기 때문이다. 이 시기마다 며칠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었다. 이렇게 허망한 이유로 말고.
모처럼 시간이 많았던 지난 1년은 나를 반성하는 시기였다.
말을 너무 많이 한 것
운동을 게을리한 것
과자를 많이 먹은 것
매사에 서둘러서 일을 그르친 것
저녁 시간 이후 하릴없이 뒹군 것
그런 나를 비우고 버렸다.
어제는 2021년도 다이어리를 샀다.
거기에 아주 신박한 계획을 쓸 것이다.
기본부터 제대로 하면 이루어지지 않을까?
계획이 눈에 선명하게 보이도록 예쁘게 꾸밀 것이다.
무엇보다 글씨가 예뻐야 하니,
낱글자 하나하나를 정성껏 연습해보고
글자들을 다양하게 조합해서 써 보고
마침내 문장을 써보는 거다.
이 참에 글씨체 교본이나 하나 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