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윤숙 Jan 25. 2021

영화 '마더'

짝퉁 모성애가 던지는 물음

그가 그려내는 모성애는 어떨까? 선악을 단칼에 가름하거나 가늠하지 않는 그가, 대개 사물을 관조적으로 응시하던 그의 시선이 어디를 향할까? 인류 전체를 감싸 안는 주제를 그라면 어떻게 다룰까? 하며 영화를 보았다.




봉준호 감독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놀라움은 이제 전 세계로 뻗치고 있다. 장면마다 넘치는 미학이나 서사를 다루는 능숙함 때만이 아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을 조용히 응시한다. 그 본성이 때론 잔인하고 처참할지라도. 보는 이로 하여금 처참함에 몸서리치고 울분을 토하게 한다. 가슴속에 달고 사는 오래 묵어 응어리진 감정, 때론 버겁고 비루하고 슬프고 고단한 감정을 영화에서 가감 없이 드러낸다. 때론 그 메시지가 들숨 한번 편하게 마시지 못할 만큼 불편하고 또 불편하다.


첫 아이가 갓 돌이 되기 전 홍역을 앓았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말 못 하는 아이가 겪는 고통이 고스란히 내게 전해졌다. 링거를 꽂고 있는 아이 손등은 시퍼렇게 피멍이 들고 고열에 시달리다 눈을 제대로 못 떴다. 그때 처음으로 아이가 아프면 나도 같이 아프다는 걸 알았다. 아직까지도 아이와 나는 탯줄로 완전히 끊어진 게 아니라는 걸. 그 뒤로 한동안 숨이 잘 안 쉬어지고 기침이 쉼 없이 나오는 증상이 생겼다. 엑스레이를 찍어도 별 이상이 없었다. 아이의 증상을 내게 복사해 오되, 바이러스까지는 제대로 복사해 오지 못한 것인가.


봉준호 감독의 '마더'라는 영화를 보았다. 첫 씬이 강렬하다. 국민배우인 김혜자 씨가 들판에서 혼자 실성한 듯 춤추며 관객 앞으로 클로즈업되는 장면이다. 앞으로 전개될 내용이 만만치 않음을 암시한다. 춤은 형태가 일정하지 않다. 팔을 위로 들어 엇박을 내며 뒤튼다. 자연히 몸도 뒤틀리고 얼굴도 일그러뜨린다. 어디에서 해방된 표정임과 동시에 괴기한 슬픔을 품은 표정이다.


그 뒤로 이어진 장면에선 작두를 썬다. 김혜자 씨가 약재를 싹둑싹둑 써는 데 눈은 작두가 아닌 아들을 응시하고 있다. 아들이 다칠세라 노심초사하면서. 그러다 아들이 다치자마자 달려간다. 부주의함으로 인해 자신의 손가락을 벤다. 이때 피를 흘리는데 그 피를 아들이 흘린 피로 착각을 한다. 늘 가시처럼 달고 사는 아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아들은 그녀의 아픈 손가락이다.


아들에겐 아픈 기억이 있다. 다섯 살 무렵 엄마가 박카스에 농약을 타서 자기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이다. 엄마는 그때 사는 게 너무 힘들어 아들을 죽이고 자기도 죽으려 했다. 한국사회에서 종종 일어나는 현상이다. 경제적 문제 등으로 가장이 일가족을 먼저 살해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곤 하는 일이. 이는 우리나라 특유의 자식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마음 때문이다. 자식이 아프면 자신이 아프다. 그러니 사는 게 힘들면 같이 죽는 것.


그 아픈 손가락 아들에게 진짜로 아픈 일이 생긴다. 마을에 살인사건이 나고 용의자로 의심받게 된 것. 이때 엄마는 아들의 무고를 밝히려다 결국 아들이 진범임을 알게 되고, 그 사실을 덮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다. 그 뒤로 아들은 풀려나지만 또 다른 '아픈 손가락'이 붙잡힌다. 아들 대신 누명을 쓰고 잡혀온 용의자는 아들보다 지적 장애가 심했다. 게다가 천애 고아였던 것. 자기 입장을 제대로 항변조차 못하는 또 다른 아들을 보자 엄마는 이 영화에서 가장 크게 오열한다. "엄마는 없니?" 하면서.

 

그전까지는 자기 아들만 아픈 손가락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다른 아이를 보며 통곡하는 모습은 모성애가 단순하지 않음을 말해준다. 모성애는 조금 더 큰 원을 그린다. 아주 오래전 조상들이 새겨놓은 기억일지도. 엄마 잃은 아이를 공동 양육했던 때의.. 하지만 그녀는 이내 생활로 돌아온다. 허물어진 가슴을 쓸어 담고 일상으로 돌아와 내 새끼를 지킬 수밖에 없는 '엄마'.


이 영화에서 엄마가 걷는 땅은 한없이 평온하고 자애로운 땅이 아니다. 처연할 정도로 아름답지만 가슴을 누르는 듯한 벽이 있는 장면들. 땅과 벽을 롱샷으로 자주 담아낸다. 모성이라는 존재는 한없이 자애롭지만 현실(가난, 이혼, 장애 등)에 부딪혀 아름답게 피어날 수가 없다.


극 중 짝퉁 모성애를 암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무면허 침술에 대한 동네 주민의 경고, 또 중국산 약재에 대한 주인의 대화 등에서. 모성애에 진짜와 짝퉁이 존재하는 걸까? 약재상 주인은 이에 경쾌하게 답한다. 주인이 약재 냄새를 맡으며 냄새가 나쁘다고 하자 엄마는 중국산이라서 그렇다고 한다. 그러자 주인이 중국산이라고 다 나쁜 건 아니라고 반박한다. 즉 환경이 나빠도 본질적인 모성애의 고귀함은 똑같다는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관광버스 씬으로 끝난다. 엄마는 살인을 저지른 것과 억울한 누명을 쓴, 또 다른 아들에 대한 죄책감에 즐겁게 놀 수가 없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침통을 꺼낸다. 남을 치료해주던 침술을 자신에게 베풀기로 한 것. 허벅지 어디쯤 침을 놓으면 나쁜 기억이 지워질 수 있다고 평소 말하곤 했다. 그 침이 이제 그녀에게 필요해진 것이다. 결심한 듯 자신의 허벅지에 침을 놓고는 사람들 속으로 빨려 들어가 실신한 듯 춤을 준다. 이는 마치 씻김굿을 연상시킨다. 죽은 영혼(자기 아들이 죽인 여자아이)을 위로하듯. 박수무당이 고깔모자를 쓰고 방울을 흔들며 작두 위를 뛰듯 강렬하고 불안한 음률에 몸을 맡긴다. 어긋나고 비뚤어진 표정과 팔로. 이때 버스 안으로 비취는 붉은 저녁노을. 어지러이 뿌려지는 아줌마들의 춤사위는 역광 실루엣으로 도드라진다.


뒤틀리고 끈질긴 모성은 아슬아슬하게 다시 이어진다. 아니 인생은, 이렇게 이어진다.



작가의 이전글 탄수화물을 참아야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