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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Jan 25. 2021

탄수화물을 참아야 한다

당뇨 전 단계 판정을 받고

집 앞 도로변에 선다. 곧바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신호등. 건너 보이는, 신호등보다 더 깜빡이는 빵집 간판이다. 향기로운 커피전문점을 스쳐서, 떡집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침을 꼴깍 넘기며 몇 걸음 더 걸으면 쪼르륵 융단폭격을 가하는 이름, 이름들. 


온갖 재료를 뒤덮어 빵 아닌 척하는 피자가게, 빵에 무늬를 새긴 와플 가게, 빵을 길게 잘라 비틀어 놓은 수제 꽈배기, 빵에 고기를 끼워서 물 타기 한  햄버거 가게, 이번엔 어차피 유명 빵집, 떡에 고추장 발라 놓은 떡볶이집, 빵을 길고 쫀득하게 만든 그냥 국수가게, 조금 멀리 나가면 빵을 때깔 곱고 무지 달게 만든 마카롱 가게, 그냥 국수라고 하면 서운해하는 칼국수 가게, 빵 위에 예쁘게 장식한 미니 케이크 가게 등등. 


이름만 다를 뿐 알고 보면 모두 빵이나 떡 변형물이다. 그리고 모두 한 가지 영양소로 수렴한다. 바로 요즘 그 악명 높은 탄. 수. 화. 물.


이 가게들을 지나치면서 침샘이 잠잠하다면 건강에 이상이 있다는 증거다. 밥을 먹고 나왔어도 말이다. 이 탄수화물 덩어리들은 태생이 아주 착하게 생겼다. 어디 그뿐인가! 가격도 비교적 착하고 모양내기나 흉내내기도 쉽다. 유통과정도 안전해서 밀가루나 쌀가루 등 언제든지 저장해 놓고 먹을 수 있다. 소화도 잘 되고 어떤 요리와도 조합이 잘 되면서 무엇보다 잔인하리만치 맛이 좋다. 


그냥 맛만 좋은 거면 비슷하게 흉내 낸 다른 음식을 먹으면 좋으련만. 식감을 따라 할 무엇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탄수화물만이 가지는, 그 뭐랄까 신발도 튀기면 맛있다는 말처럼 해물, 육고기, 야채 그 무엇이든 탄수화물 옷을 입혀 기름에 튀기면 바사삭하는 식감이 생겨난다. 그 바삭함을 이빨에 베어 문 순간, 이 세상을 다 얻은듯한 충만감이 밀려온다. 


그토록 처연한 맛의 향연을 베풀어주는 탄수화물은 나와 너무도 친밀했던 것이다. 뭐든 적당하면 좋았으련만. 다른 영양소와 비율을 맞추어 가면서 탄수화물만 편애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런데 이 놈의 탄수화물이란 녀석이 아주 만만한 데다 효과까지 만점이라서. 무엇보다 기분이 안 좋을 때 맛있는 빵이나 튀김, 매운 떡볶이 등을 먹으면 금세 뇌가 화사해진다. 그런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대체....

 

모든 문제는 숫자로 그 정체를 드러낸다. '당뇨병 전 단계' 수치로서. 그동안 무절제하게 위 속에 쑤셔 넣은 결과 얻게 된 성적표였다. 기분이 꿀꿀할 때나 배는 고픈데 밥맛은 없을 때, 또 고기 등을 잔뜩 먹고도 달달함으로 마무리하고 싶을 때 거리낌 없이 손을 뻗쳐 집어 든 결과로.


이 전 단계라는 말은 마치 공포 영화 예고편 같다. 이 정도로 무시무시하니 볼 테면 보고 말 테면 마라. 안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방법은 있다. 실천하기 힘들 뿐. 철저한 식단 관리와 운동이다. 또 하나 있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 문제는 식단관리와 운동을 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다.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미션 임파서블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음식을 안 먹거나 아주 조금만 먹고 그토록 싫어하는 운동을 하고 절대, 절대로 스트레스는 받지 말 것. 



단것을 안 먹는 건 참을만했다. 문제는 탄수화물이다. 오랜 연인처럼 내 곁을 지켜주던, 좋아하는 음식이 죄다 탄수화물이니. 절제를 결심한 후 알게 되었다. 맛있는 음식점들의 요리 재료가 주로 탄수화물이라는 것을. 당분간 그 무차별 폭격을 뚫고 다녀야 한다.  차라리 안 보련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 당뇨라는 괴물에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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