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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Dec 30. 2020

진짜 자존감

이우의 자전거 할아버지

 어딜 가든 자존감이라는 단어가 눈에 띈다. 우리 어린 시절엔 입에 담을 일이 별로 없던 말이다. 그땐 '나' 보다는 집단으로 대우받았다. 형제 수도 많았고 '나' 자체로 존중받으며 살지 못했다. 요즘은 한 둘만 낳다 보니 가정에서도 귀한 존재이고,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분위기다. 그런데도 요즘 사람들은 자존감 문제로 괴로워하고 있다.






자존감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중국 상해 살 때 일이다.


중국 '이우'라는 곳에 출장을 간 적이 있다. 이 도시는 '전 세계의 공장'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공장이 많은 곳이다. 이 공장들에서 세계인들이 쓸 소소한 물건들이 대량 생산된다. 덕분에 공장 노동자들로부터 거대한 부를 이룬 부자들이 극과 극의 삶을 이루며 산다. 특히 고급 외제 승용차들이 골목마다 즐비했는데 차고도 없이 그냥 길가에 주차해 놓고 사는 경우가 많았다.


하루는 좁은 골목에 최최최고급 승용차가 진입했다. 승용차가 진입하기엔 너무 좁은 골목이라 놀라고 있었는데 마침 맞은편에서 자전거를 타고 오는 노인이 있었다. 늙고 마른 할아버지였는데 허름한 러닝셔츠 바람의 그 할아버지는 마주 오던 승용차를 노려보며 그대로 페달을 달렸다. 그러자 승용차 주인도 질세라 가던 길을 멈추지 않았다. 그 뒤로 어떻게 되었냐면...


자전거 전사 할아버지와 승용차 주인이 몇 번 눈빛 교환을 하더니, 자전거 할아버지가 승용차를 노려보며 자전거에서 내렸다. 그러더니 골목을 휙하니 떠나버렸다. 아주 당당한 걸음으로 팔을 휘저으면서. 할아버지는 그곳에 갈 일이 있으셨던 모양이었다. 그러자 승용차 안 주인은 어쩔 줄 몰라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분함과 당황스러움이 얼굴에 스쳤다. 당연히 자전거 주인이 물러갈 줄 알았을 테니까. 자기 차가 훠얼씬 비싸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골목은 승용차가 진입하기엔 너무 좁은 곳이었다. 그러니 할아버지 입장에선, '너는 틀리고 나는 맞다. 그러니 네가 물러서야 한다. 나는 갈길을 가겠다.'라는 식.


아무리 물질 만능주의가 판치는 도시지만 자신의 지조를 버리지 않으시는 당당함이 멋졌다. 우리나라라면 어땠을까? 좁은 골목이든 뭐든 6,7억쯤 하는 승용차가 골목으로 들어서고 있다면 급히 피했을 것이다. 그 차에  흠집이라도 나게 되면 물어줄 일이 아득해서다. 아니면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마주 보고 돌진하지는 않을 것.


그 순간, 맞아. 자존감은 이러라고 있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되는 일에 절대로 쫄지 않는 것 말이다. 자기가 가진 것에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자기 자신에게 당당한 것, 세상 누가 뭐래도 나의 길을 가는 것.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승용차 주인이 자전거를 치우고 직진했는지 뒤로 돌아나갔는지. 다만 승용차 주인의 당황하는 눈빛만 고소함으로 남아 있다. 돈이면 다 되는 줄 아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희석되었길 바라는 마음도 들었다. 자전거 할아버지는 그 후로도 계속 생각났다. 허름한 자전거에 후줄근한 옷차림이라고 해서 자존감마저 후줄근하지는 않았던 할아버지.


그 도시 전체에 퍼져있는 '돈신'을 숭상하는 분위기, 그 안에서 고고하게 자존감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이 대단해 보였다. 번쩍거리는 옷차림에 명품가방을 들고도, 더 멋진 옷차림과 더 비싼 명품백 앞에서 무너지곤 하는 사람들. 그들에 비해 얼마나 경제적인 마음가짐인지.


자유경쟁 체제가 정말 지겹다. 이 체체 앞에서 우울한 건 젊은이나 나이 든 이들이나 마찬가지다. 나보다 더 큰 평수에 사는 사람 집에 가면 기가 죽곤 하는 일들이. 이우의 자전거 할아버지처럼 당당해지면 참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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